본문 바로가기
일상

타로점을 보는 이유

by @블로그 2023. 1. 20.
반응형


사람의 눈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내재적인 침울함의 눈
맑은 눈의 광인
살기나 독기 희번덕 거리는 눈
치기 혹은 어린아이 같은 눈
눈에서 빛이 나는 사람
선연하고 초연한 눈빛
무지하지만 색기가 넘치는 눈빛
교만한 쨍한 눈빛
풀린 눈

돌이켜 보니 다 구분이 되고 알 것만 같다
왜 그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결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중과 방향성이 읽힌다

이미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애써 내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었을 뿐... 영혼이나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라는 클리셰가 아니라 그냥 드러난 뇌라고 생각하면 더 잘 읽힌다.

눈에서 말하는 메시지를 읽어 지금 나와 맞는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이 운명을 만들어내는 궤적이었다


직업선호도 검사를 했는데 내 안의 성실함, 우울, 분노, 열등감, 우월감 등 다양한 감정이 발견 됐다. 어울리는 직업 중에는 방송작가도 있었다. 그 직업을 안 하려고 발버둥은 지금도 치고 있는데 국가자격기술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연말에는 2주 정도 어지럼증이 왔었다. 엄마는 간호사셔서 내가 메니에르병 일 수도 있다고 했다.

팟캐스트 원고는 라디오 작가를 5년 했던 나에게 다시 글을 쓰게 하는 기회이자 시드이다. 그 작업을 통해서 목소리가 주는 영향력에 대해 다시 한번 실감하고 익숙했던 글귀 앞에서 글감들을 떠올린다. 아. 나 작가였지. 감사하게도 다른 글들에 한 눈 팔지 않았던 시기가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는 시인이 됐고, 교수가 됐고, 내가 읽은 만화의 추천사를 쓰는 사람이 됐다. 그를 다시 만날 일을 아마도 거의 없겠지만 우연 또한 운명이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만나고 싶은 속내를 이렇게 변명처럼 늘어놓는 것일 수 있다. 정서적 사랑이 육체적 정욕의 수치를 낮출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면밀한 친구처럼 다시 만나고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손을 조물딱 거리고, 한여름의 땀냄새도 섹시하다고 해준 그는 어쩌면 날 정말 있는 그 자체로 좋아해 주던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사랑하기 위해서 대학을 갔고, 그 사랑을 증명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남은 사랑을 완성하고 싶어서 생계형 작가가 됐지만 내 앞에 남은 숫자들의 그 무의미함과 부질없음에 모든 것을 놓은 지 1년이 지났다.

글은 치유도 아니고 공감도 아니고 발견도 아니다. 글은 비명도 언어도 슬픔도 이해도 아니다. 글은 폭력을 견딜 힘도 주지 않는 도피적 상상의 진공상태다. 20년 전의 감수성 따위가 중년을 준비하는 나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했다. 그 글이라는 중력과 자기장이 주는 힘에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픽션에세이조차 쓰지 않았다.

진실은 언제나 알 수 없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벗어나고 절단하고 아물기도 전에 떠나지고 사라지는 행위들은 면죄부를 줬던 내 과거의 선의에 대한 배반인 것이다. 도피 역시 교만이겠지만 그것 또한 내적 자유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다. 나르시시즘적인 타인의 모욕감. 누구나 언젠가 타인과의 심리적 공간을 버리고 어느 순간 텅 빈 곳에서 혼자 올연히 행복해져야만 한다. 의지할 수도 의존할 수도 없는 절대타자들과 다시금 어울려야 한다. 그들은 내 진심과 악의 또한 모를 것이고 저속한 쾌락과 음란한 상상 따위의 어설픈 우월감도 도구처럼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작가가 아니다. 미래를 위한 상상이 계획이라고 여기며 현재의 상상을 망상이라고 치부한다. 이룰 수 없으면 망상이고, 실현 가능하면 추진력이 담긴 포부가 된다. 더 웃긴 것은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니 망상이다, 아니다 하는 이분법은 또한 무의미한 겁에 질린 도발일 뿐이다. 가끔 타인을 그냥 내버려 둬야 할 때가 필요할 뿐,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타로는 78장의 그림으로 내담자의 증폭된 고민들을 명징하고 단순화해 주는 도구로서 배열과 확률의 우연한 징표일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마스터의 견해가 맞았다고 해도 명리나 주역처럼 기원과 원리에 대한 증명은 불가하다. 모든 것은 허상이고 그것이 의미와 무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내담자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사소한 고통이나 격정적 무게의 불안 때문에 흔들리면서 또 다른 퀴어인 나에게 질문하는 것을 얼마나 아름다운 떨림인가. 우리는 그림 맞추기를 통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누군가도 저를 좋아할까요? 누구나 사실 사랑을 질문한다. 그때의 우리는 악의도 없고 속세의 인물도 아니며 그저 시인처럼 고결해진다. 나는 그 질문이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사유라 전하고 싶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