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분 살인사건 >
후덥지근하다기보다는 끈끈하게 무더운
여름 밤이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대도 땀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바깥 공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방안마다 훌쩍거리는 소리
속에 눈물이 찔끔찔끔 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10층, 11층으로 솟아 있는
아파트의 비둘기장마다,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의 비좁은 안방마다, 하여간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4천만이
모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느라고 숨을
죽인 그러한 밤이었다.
이산가족찾기가 근 한 달째 계속되던
여름 밤. 모두가 텔레비전 앞에 붙어
나는 이 날도 목마른 감동을 짜내 가며
민족의 비극이니 어쩌니 해가면서 어제와
거의 같은 내용의 기사를 끙끙거리고 써서
데스크에 넘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밤
10시가 가까워서였다.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16동 맞은 편인
23동 입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사고가 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직업적인 본능으로 뛰어갔다.
"아니, 날벼락이라는 것이 따로 없구먼,
이게 바로 날벼락이야......."
웅성거리고 있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탄식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가 보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번질번질한 것이 먼저
위로 뿌리가 드러난 고무나무 한 그루가
나뒹굴어 있고 여기저기 흙과 깨진
화분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고무나무 화분이 떨어져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었습니까?"
나는 아무에게도 아닌 질문을 던졌다.
"즉사죠, 즉사."
금테를 두른 23동의 수위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누가 맞았는지 시체는 이미 옮겨지고
없었다.
나는 핏자국이 흥건한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빨간색의 포니 승용차가
문짝에도 피가 튀어 검붉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 차에서 내리던 사람이 위에서 떨어진
화분을 머리에 맞은 것이군요."
나는 또 누구에게도 아닌 말을 하면서
위를 쳐다보았다.
1층, 2층, 3층......7층까지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가 검은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어두운 하늘에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의 거인처럼 보였다.
언젠가는 저 높은 괴물이 밑에 지나다니는
개미떼 같은 사람에게 날벼락을 내릴
것이라는 공포를 나는 가끔 느꼈다.
아파트에 이사를 오던 날부터 누군가가 저
위 베란다에서 조그만 실수로 밑에
기어다니는 개미떼의 머리를 박살낼지
있었다. 그것이 마침내 오늘 밤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경찰에 알렸습니까?"
내가 다시 금테 수위를 보고 물었다.
금테 수위는 별 싱거운 놈 다 봤다는 듯이
나를 힐끔 쳐다보다가 말했다.
"벌써 강남병원으로 다 옮겼어요."
시체를 옮겼다는 말 같았다.
"누굽니까?"
금테는 다시 별 놈 다 봤다는 듯이
내뱉았다.
"308호실 여사장님이랍니다. 이 무슨
날벼락이람......."
"화분을 조심해서 간수해야지. 그래 사람
잡으려고 그런 걸 위태위태한 곳에 놔 둔단
말야? 아이구 무서워. 이놈의 아파트 빨리
중년 아주머니가 침을 퉤퉤 뱉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두어 블록 떨어져 있는
강남병원으로 갔다. 병원 현관으로
들어가다가 낯익은 추 경감을 만났다.
내가 서부경찰서 출입기자로 다닐 때
무던히 나한테 애를 먹은 경감이었다.
요즘은 시경 강력계에 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추 경감 오랜만이오."
"아니 이게 누구야? 임 기자 아닌가."
마음씨 좋은 추 경감은 진심으로 반가운
듯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작달막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 그러나 결코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유순한 얼굴의 추 경감은 함박
웃음을 담았다. 그가 웃을 때는 그 큰 눈이
추 경감은 이날 밤 시경 상황실 숙직
근무를 하다가 신고를 받고 이
아파트촌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죽은 사람이 누굽니까?"
나는 대강 수인사를 끝낸 뒤 추 경감에게
물었다.
"뭘? 아파트서 화분 벼락 맞은
여자......."
추 경감은 말을 얼버무리는 것 같았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추 경감은
기자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할 때에는
언제나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성격 때문에 항상 기자들한테
꼬리를 잡혔다.
"피살된 여자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란
"아직은 살인사건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요."
추 경감은 나의 '피살'이란 말에 확실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여자는 배순실이라고 조그만
봉제회사의 여사장이지."
"여사장? 얼굴은 예쁩니까? 나이는?"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뱉었다.
추 경감은 내 질문에 답변은 않고 병원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 놓인
자동판매기 앞으로 갔다. 동전을 꺼내
아이스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아이구 더워. 한 잔 합시다."
추 경감은 복도의 기다란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순실 사장의 남편은 거도물산이라는
말하자면 부부 사장이지."
추 경감은 차근차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배순실 사장은 이날 밤 9시 30분께
외출하고 돌아와 308호실 전용 주차장인
그곳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막 내리는
순간, 위에서 조그만 고무나무 화분이
떨어져 정확하게 정수리를 때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
화분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없고
분명히 그 주차장 위쪽 어느 층에선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위치로 떨어졌기 때문에 인위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거기에 화분을 떨어뜨릴 수 있는 아파트
호수는 여섯 가구라고 했다. 그 주차장이
있지만 맨 밑에 층인 1층을 제외하고 2층인
208호, 3층인 308호, 그리고 4층이란
호수는 안 쓰니까 508호, 608호, 708호,
808호 등이다. 1층에선 화분을 떨어뜨릴
수가 없으니까 우선 용의 호수에서
제외돼야 한다.
"그 여자는 3층에 산다고 했죠?"
내가 질문하자 추 경감은 빙긋이 웃었다.
"남편이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군요. 하지만 남편인 허벽 씨는 현장에
있었다는데요."
추 경감이 헛 짚었다는 투였다.
"아니? 죽는 현장에 같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 것도 아니고, 사고가 나자 채
15분도 안 되어서 뛰어왔는데......."
"그게 아니고 옆 건물에 있는
헬스센터에서 왔다는군요."
나는 그 말이 퍽 석연치는 않았으나
덮어두고 추 경감의 설명을 계속 들었다.
"그런데, 그 흉기인 화분이란 것이 누구
집 건지 알 수가 없어요. 하기야 조그만
화분이야 아파트 사는 사람치고 한두 개 안
가진 집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이
아파트는 베란다 난간 끝에 화분을 내다
얹어 놓을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지요. 임
기자가 이 아파트에 사니까 잘 알 것
아닙니까?"
그건 그랬다. 원래 아파트를 지을 땐
베란다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평수를 좀
넓게 쓰기 위해 그 베란다에 모두 알루미늄
샷시를 대고 유리를 끼워서 실내로 만들어
베란다라곤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아파트 6가구 중 어느
층에선가 화분을 들고 배순실 사장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머리
위로 떨어뜨려 살해했다는 것이 확실한 것
아닙니까? 다른 신문사 기자는 아직
모르죠?"
나는 눈에 생기가 바짝 돌았다.
특종기사의 꿈에 사로잡혔다.
"배순실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본적은?
가족 상황은?"
나는 수첩을 꺼내 들고 다시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추 경감은 풋나기 기자처럼 흥분해서
설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 밤 우연히 주운 기사로
특종을 하게 되었다. 특종을 하게 되자
나는 더욱 욕심이 났다. 범인을 캐내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직접 범인을 캐내지
못한다면 추 경감한테 들러붙어서라도 범인
체포의 특종을 또 한 번 써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임시로 맡고 있던
이산가족찾기 취재를 잠시 덮어 놓고 이
사건에 몰두하게 되었다.
아파트 화분 날벼락 사건의 임시
수사본부가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반포파출소에 설치되었다.
나는 거기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 내고
수첩을 정리해 두었다.
배순실과 허벽 부부에 관한 것부터
정리해 나갔다.
부인으로 갱년기에 접어든 나이였다.
그러나 마흔이 넘은 여자같지 않게 얼굴이
빼어난 미모였으며 중년 부인, 특히 부유층
여성이라면 허리통과 목이 굵고, 두 볼이
심술이 가득 든 듯 불룩한 것을 연상하지만
배순실은 그와는 딴판이었다. 체중이
46킬로에 가는 허리, 긴 목, 그리고 오똑한
코며 맑은 피부가 로코코시대의 프랑스
귀부인 같았다고 이웃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는 남편이 경영하는 농수산물
수출회사의 이사로 되어 있었지만 놀기가
심심하다고 신길동에 조그만 봉제공장, 즉
인형공장을 차려놓고 사장직을 맡아
소일삼아 나가고 있었다.
남편인 허벽 사장과는 19년 전에
연애결혼 했다고 한다.
봉제공장을 찾아갔다.
그곳의 공장장인 김형자라는 여인이
배순실과 고등학교 동창생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디룩디룩 살이 찌고 볼품
없이 생긴 여자였다.
"배 사장과 허 사장이 어떻게 연애를
하게 됐냐구요? 아니 장본인이 죽고 없는데
그런 것은 알아서 뭘 하디요?"
공장장의 말투에는 이북 지방 사투리가
가끔 섞여 나왔다.
"글쎄요. 뭐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만
혹시 범인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하고......."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공장장은 입맛을
쭉 다시며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수첩을
꺼내 들며 앉았다. 공장장도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걘 나와 같이 니북에서 피난
나왔댔어요."
공장장은 사장 칭호를 싹 빼고 '걔'로
얘기를 시작했다.
"걔가 그러니까 열세 살 때였죠.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과 함께 피난을
나왔디요. 그렇지, 그 여동생이 일곱
살인가 였디요. 그러나 피난길에 수원
어디멘가에서 그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영
찾질 못했어요."
"그럼 아버지와 둘뿐이었겠군요."
"그렇디요. 두 부녀는 대구로 부산으로
다니며 미군복 염색공장을 해서 꽤 돈을
모으고 나중에는 서울에 정착해서 통조림
공장을 차려 큰 돈을 벌었디요."
않았나요?"
"녜. 그 아바이가 얼마나 신실한
사람인지 니북에 있는 마누라쟁이를 못ㄴ어
끝내 혼자 살다 갔디요."
공장장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렸다.
"그러면 허벽 사장은......."
"예. 그 허벽 사장은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공장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통조림 공장이 꽤 잘 되자 대학을 갓
나온 순실이가 와서 일을 거들게 되었디요.
순실이는 주로 관청에 출입을 하며 공장을
도왔는데 그때 관청의 계장이 바로 허벽
사장이었디요. 근 일 년 동안 순실이가
관청을 들락날락하며 그 계장 눈에
들었던가 봐요. 하루는 계장이 순실이
졸라댔어요. 처음엔 순실이 아버지도
그렇게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지만 워낙
끈질기게 들어붙자 아바이도 그만 손들고
말았디요. 두 사람은 결국 혼인식을 올리게
되고 아바이가 돌아가시자 허 사장이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주 그 회사를
맡아 버렸죠."
"말하자면 처가 재산으로 사장이 된
셈이군요."
"허지만 허 사장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디요. 젊을 때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새파란 젊은 나이에 계장님이었다니까요."
"두 분 사이에 아이는 없었나요?"
"왜요, 아들 하나가 있는데 지금 군대에
가 있어요. 그 아파트엔 두 부부만
살았디요. 두 부부가 쓸쓸하긴 했겠지만
같은 년은......."
나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일어섰다. 그
뒤는 공장장 신세타령이 나올 것이 뻔했다.
나는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고 후회하며
아파트촌으로 다시 갔다.
나는 우선 화분이 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2, 5, 6, 7, 8층의 각 8호 가정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2층에는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이 고교에
다니는 여자 동생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라 보름 전에 집에 가고 없었다.
그렇다면 그 호수는 빈집이었으니까
용의점에서 벗어났다.
508호는 두 부부와 국민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있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
나는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이 집
공장에서 만드는 봉제품 인형을 사다가
구미 등지로 팔고 있는 조그만
수출상이었다. 배순실 부부가 이 아파트에
온 것도 박윤준 사장의 권유였다고 한다.
나는 박윤준 씨의 아파트에 다짜고짜
들어가 보았다. 문이 잠기지도 않고 열려
있었다. 마루에서 열한두 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공포에 질린 채 나를 쳐다봤다.
낯선 침입자에 대한 공포와 경계였다.
"아, 아저씨 나쁜 사람 아냐. 어머니
어디 가셨니?"
아이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 여전히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 가셨어요. 지금 저 혼자 집 보고
있는 거예요."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나왔다. 다음
608호 가정을 수소문해 보았다. 그 집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사건 나기 전
날 부부가 함께 제주도로 바캉스를
떠났다고 한다.
708호엔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배순실과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808호. 이 집은 배순실과
동창생이며 봉제공장 공장장인 김형자의
집이었다. 김형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그
소생인 딸 둘도 남편한테 뺏긴 채 이혼
위자료로 받은 돈으로 이 아파트를 사서
살고 있었다.
![](https://blog.kakaocdn.net/dn/Z1dyp/btrJhjwweq7/KUG4KKQkM3RlTGJvfyc5Lk/img.jpg)
그렇다면 용의 아파트 중, 1층과 비어
바캉스 가고 없는 608호를 빼면 나머지는
박윤준 사장이 사는 508호와 노부부가 사는
708호, 김형자가 사는 808호가 남는다. 그
중 노부부는 배순실과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으니 우선 제외하면, 나머지 용의자는
남편 허벽과 박윤준 사장, 김형자 공장장
등 세 사람이 남는다.
이 세 사람은 무엇인가 배순실을 죽일
만한 이유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남편
허벽은 사건 시간에 헬스 클럽에 있었다고
하니 일단을 알리바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좀더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
수사본부인 반포파출소로 추 경감을 만나러
갔다.
"아니, 임 기자는 이 사건에 아주 재미를
추 경감은 무언가 열심히 도표를 그리고
있다가 예의 주름살 투성이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고 웃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코라도 안 나는 냄새야 맡을
수 있어요?"
추 경감의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범인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만 좀......."
"또 슬슬 취재 솜씨가 나오는군. 그래
궁금한 게 뭐요?"
역시 맘씨 좋은 추 경감이다. 아는 대로
다 대겠다는 투다.
"거 508호실 사는 박윤준
사장말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추 경감은 손을
"그 박 사장이 봉제공장 배순실한테
지불할 돈이 있는 건 틀림없어요."
"예? 지불할 돈이라고요?"
"아직 그것은 취잴 못했소? 배 사장의
인형을 갖다 수출하는데 지불할 돈이
없겠습니까? 2천 6백만 원을 이달 말까지
청산하기로 돼 있더군요. 허지만
헛수고입니다. 박 사장은 사건 시간에 자기
방에서 텔레비전으로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보며 눈물을 짜고 있었으니깐요.
함께 텔레비전을 본 사람은 아내, 두 아들
그리고 자기 차의 운전사 모두 다섯
사람이나 되니까요."
추 경감은 아예 그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럼 꼭대기 층의 공장장
"아 그 못생긴 생과부 말이군요. 그
여편네도 그 시간에 신길동 봉제공장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증인은 있습니까?"
"혼자 텔레비전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나요. 그가 있었다는 현장도 다
봤습니다만......."
추 경감은 이 대목에서 별로 자신이
없다는 투다.
"남편인 허벽 씨가 사건 직후 십여 분
만에 현장에 왔다는 것이 처음부터
걸립니다. 그건 좀 캐보셨나요?"
나는 슬금슬금 걸어가며 추 경감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도표를 슬쩍
보았다. 그것은 타임 테이블 같은
것이었다. 배순실 사장이 저녁 8시 10분
스튜디오에 도착, 거기서 약 40분 머문 뒤
9시 28분 아파트에 도착, 차에서 내리다
피살된 걸로 되어 있었다.
"허벽 사장이 헬스 클럽에 간 것이
사실이냐, 시간을 따져 봤느냐 그거겠죠?
물론이죠. 허 사장은 8시 40분까지 아파트
자기 방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아파트서 내려와 헬스 클럽에 가서 약 30분
동안 사우나를 하고 막 나오다가 아내가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다
확인되었지요."
나는 경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배순실의 그날 행적, 즉 타임 테이블을
머리 속에서 굴리고 있었다.
"배순실이 여의도 방송국엔 무엇하러
갔습니까? 더구나 밤중에...... 지가 무슨
내가 눈웃음으로 머금은 채 경감을 빤히
쳐다보았다. 추 경감은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한테는 약했다.
"그것도 아직 모르셨수? 쯧쯧. 그럼
배순실이 이산가족이란 건 아시오?"
그때서야 내 머리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그럼 배순실이 피난 때 잃어버린 그
여동생을 만났나요?"
"그렇지. 바로 그거요. 방송국에 동생을
찾아 달라고 신청해 놨는데 그때 동생이
나타났다는 거요. 남편 허벽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동생이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배순실은 허둥지둥 8시 45분께
차를 몰고 여의도로 간 거지요."
즐거운 날, 오매불망하던 동생을 찾았는데
이번엔 자기가 목숨을 잃다니."
"다 운명의 장난이지요. 난 배순실이 그
여동생과 만나는 장면을 경찰국 상담실에서
텔레비전으로 보았는데 참으로
감격적이던데요. 두 자매가 어떻게 통곡을
하던지......."
"그럼 그 장면이 생방송 되었습니까?"
"물론이죠. 그녀의 남편은 물론 우리
사천만 민족이 다 보고 맘속으로 박수를
쳤을 겁니다."
추 경감은 자기 일이나 된 것처럼 우쭐해
했다.
"9시 28분에 아파트에 도착,
피살이라....... 당시 목격자는
누구였나요?"
"목격자요? 아니, 그 시간에 텔레비전 안
보고 누가 아파트 밖에 나가 별이나
쳐다본답니까? 수위도 텔레비전 보느라
배순실이 차 타고 오는 것도 못 보고
있다가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
나갔다니깐요."
"경감닌. 그럼 누가 이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수록해 놓았습니까? 20분께,
30분께도 아니고 45분, 28분,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타임 테이블의 도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덕분이지요. 모두가 그 생방송을 보고
있었으니까 시계는 안 봤지만 그때
텔레비전은 무슨 장면을 했느냐고 물어서
가령 수위가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나갔다면, 그때 당신은 무슨 장면을
보다가 나갔느냐고 물어서 그 장면을
방영한 시간이 몇 시 몇 분이냐고 방송국에
물으면 틀림없는 시간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서 추 경감은 아주 신이 나서
크게 제스처를 써 가며 설명했다.
수사의 초점은 허벽, 박윤준, 김형자로
일단 좁혀졌지만 모두가 확실한 동기나
증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수사반은 다른 방향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피살자의 남자관계 등을
캐고 있는 것 같았다. 피살자가 워낙
뛰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에 살펴볼 만한
방향이었다.
사람, 즉 남편 허벽, 거래관계자 박윤준,
공장장 김형자 중의 한 사람이 범인일 것
같았다. 이것은 수사관의 육감이 아니라
신문기자의 육감이기도 하다.
남편 허벽은 집념이 대단하고,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처가의 재산 위에 얹혀서 사장이
되었으니 마누라가 항상 거북한 존재였다고
가정할 수가 있다. 자기도 이 나라의
엘리트인 행정고시 출신의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인데, 한 여자한테 눌리다시피해서
일생을 보낸다는 것이 답답한 노릇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마누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을지 모른다.
다음 박윤준, 그는 요즘 사업이 잘 안 돼
그날 그날 부도를 막느라고 정신이
6백만 원짜리 빚, 배순실만 없어지면
어떻게 방법이 나올지 모른다. 자기
운전수와 짜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화장실
갔다 오는 척하고 범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순실이 그 시간에 돌아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다음 김형자. 그녀도 범행을 할려면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늘 동창생인
배순실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우선 외모가 자기보다
뛰어나게 아름답고, 자기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더구나 자신이 말했듯이 자기는 못 가진
남편을 가진 배순실에 대해 극도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용모, 지위,
비교도 안 되는 배순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마침내 질투로 변하고, 그 질투는
이글거리는 불덩이로 변해 살인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용의점이 많은 사람은 남편 허벽일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자꾸 뒤꼭지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허벽 사장을 만나러 강남병원
영안실로 갔다.
영안실 빈소를 찾아 들어서자, 맞은편 단
위의 검은 리본을 늘어뜨린 배순실 사장의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빼어난
미모였다. 미인은 단명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빈소 안의 의자에는 여기저기 몇 사람이
"허 사장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여복도
많은 사람이야. 또 장가를 들어야 할 것
아닌가?"
"남자는 상처를 하고 나면 화장실에 가서
씩 웃는다면서?"
"예끼 이 사람. 저기 망인이 듣겠네."
"들으면 들었지. 허 사장이 이번에 새
장가를 들면 또 배 사장만한 미인을 얻게
될까?"
"그렇다면 미인 아내가 몇 번짼가?"
"따지고 보면 세 번째가 되지 않나?
제기럴, 누군 쭈구렁 바가지 같은 여편네
하나만 데리고 일생을 사는 불운도
있는데......."
이야기를 주고받던 남자들은 나이로 보아
허 사장의 친구들인 것 같았다.
아내란 말에 귀가 번쩍했다. 배순실과
재혼했다는 말은 새로운 정보였다.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는 틈을 타서
그를 뒤따라가 말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저어 좀 참고할 일이 있어선데요. 허
사장의 죽마고우지요?"
그는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얘기를 했다.
"아, 경찰서서 오셨군요. 뭐 이제야
비밀도 아니니 다 말씀드릴 테니 뭐든지
물어 보십쇼."
"저 배순실 사장이 허 사장의 두번째
아내라고 얘기들을 하는 것 같던데......."
"예, 그것 말입니까? 허허허. 그 첫번재
여자도 굉장한 미인이었죠. 뭐 정식 결혼한
것은 아니니까 마누라라고 할 것은
그의 얘기는 허 사장이 공무원 생활을
하던 총각시절 자주 다니는 직장 옆의 다방
아가씨를 가까이 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 레지 아가씨도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는데, 허 사장의 프로포즈에
넘어가 결혼도 하지 않고 몇 달 동안 동거
생활을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허 사장은 배순실을 알게 되자 그 다방
아가씨를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한다.
"그럼 그 아가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요.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된
일이니까. 그땐 그 아가씨가 자살하겠다고
약을 먹는 바람에 나까지 뒷수습하느라
혼이 났었지요. 허지만 지금은 어느 착한
남자의 아내가 돼 있겠지요."
"그 아가씨는 가족도 없었나요?"
불쌍한 애라고들 했습니다만......."
그때였다. 누군가가 우리 사이에 쑥
들어섰다.
"자넨 무슨 쓸데없는 소릴 자꾸 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허 사장이었다. 허 사장은
못마땅한 듯이 친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잠깐 문상을
왔다가......."
내가 허 사장을 알아보고 먼저
얼버무렸다. 무언가 석연찮은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이 같다고 내 스스로 생각했다.
"아, 기자님이시군요. 또 무슨 특종을
하실려고......."
허 사장은 심히 못마땅한 표정
"이번엔 나를 범인으로 생각하시나요? 왜
뒷조사는 하러 다닙니까? 그래 뭣 좀
캐냈습니까?"
허 사장은 여전히 비꼬는 말투였다.
"그럴 리야 있습니까. 다만......."
"다만 뭡니까?"
허 사장은 더욱 퉁명해졌다.
"이 더운 여름밤에 갑자기 사우나탕엔 왜
들어갔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왜요? 여름엔 헬스 센터도 못 가고
사우나도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기자양반은 이열치열이란 것을 아시오?"
나는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소득이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물러나왔다. 그 길로 곧장
클럽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날 허 사장을
보았다는 젊은 종업원을 만났다.
남자 손님 잔심부름이나 해주고 때로는
때밀이도 하는 그런 젊은이였다.
"그날 허 사장님은 사우나탕에서 약
30분쯤 있다가 9시 40분께 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잘 기억하지?"
"벌써 형사 나리들이 와서 몇 번이나
물어보고 조사해 간 건데요. 그날 허
사장님이 사우나탕 안에서 저를 부르기에
뛰어갔더니 수건 한 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더군요. 허 사장님은 꼭 30분씩 땀을
빼거든요."
"그때 30분 됐단 것은 어떻게 알았어?"
"예, 바로 저겁니다."
젊은이가 옆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모양으로 생긴 모래시계였다. 유리로 만든
삼각형 통이 양쪽에 붙고 허리가 잘룩한
모래시계. 위쪽 유리통 속의 모래가 아래의
유리통 속으로 조금씩 흘러내리게 돼 있는
것이다.
"이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다 흐르면 꼭
30분이지요. 제가 허 사장한테 갔을 때 위
모래가 거의 다 흐르고 일이 분 걸릴
정도로 조금 남아 있었지요."
"그걸 본 사람은 자네와 허 사장 두
사람뿐ㅁ이란 말이지?"
"아뇨. 저 자동차 서비스 김 사장도 마침
그때 들어왔지요."
"허 사장이 처음 이 헬스 클럽에
들어오는 것은 보았나?"
"아뇨. 텔레비전 생방송 보느라고 허
모래시계를 보면 30분쯤 전에 왔다는 게
틀림없죠."
젊은이는 모래시계를 엎었다 세웠다
하면서 설명했다.
나는 여기서도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허 사장이 사건이 난
15분 후에 현장에 왔으니까 30분 동안
사우나탕에 있었다면 완전한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다음날 나는 임시 수사 본부로 갔다.
임시 수사 본부의 좁은 실내엔 의외의
광경이 벌어졌다. 책상 위 여기저기에
고무나무며, 진달래며, 풍란이며 여러 가지
화분이 잔뜩 얹혀 있었다.
"아니, 범인이라도 잡았나요? 이게 웬
축하 화분들입니까?"
빙긋이 웃었다. 빙긋이 웃는데도 그의
주름투성이 눈살이 그 큰 눈을 감추며 함박
웃는 것 같았다.
"화분들한테 좀 물어 봤지만 범인은
모른다고 입을 딱 다무는군요."
이 화분들은 박윤준 사장, 허벽 사장,
김형자 공장장의 아파트서 가져온
것들인데, 범행에 사용된 고무나무 화분과
유사한 점이 없나를 며칠 동안 감정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화분
그릇의 유사점, 화분에 사용된
밑거름의분석 등을 해봤으나 깨진 화분이
어느 집 것이란 것을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흉기로 사용된 화분과 같은
것을 만들어 아파트의 여러 사람에게
보였으나 아무도 그것이 뉘집 화분이라고
"말하자면 화분 몽타즈를 만들어 수배를
한 셈이군요."
"그게 그렇게 되나? 허허허. 경찰질 이십
년에 화분 지명 수배란 말은 처음 듣는군.
허허허......."
추 경감은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웃는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분들 틈에
비디오(VTR) 한 대와 컬러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아니, 경찰서에 이건 또 뭡니까? 문화
영화라도 보셨나요?"
내가 묻자 추 경감은 비디오의 플레이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에는 곧
이산가족찾기 프로가 흘러나왔다.
"이건 또 왜요?"
사건 날 밤 8시 50분부터 9시 50분까지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프로가 녹화되어
있습니다."
"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녹화를 했습니까?"
"허 사장이죠."
"그럼?"
"뭐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요. 허 사장이
자동 타이머로 녹화한 것이니까. 허 사장은
배순실이 생방송으로 나올 테니까 그걸
녹화해 두고 싶었겠지. 자동 타이머 장치를
8시 50분부터 9시 50분까지 녹화하게
해놓고 헬스 클럽에 갔으니까요."
추 경감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 타이머?"
"임 기자 집에 비디오 없나?"
"저 같은 박봉 기자가 무슨......."
"허허허. 요즘은 기자 봉급이 우리
공무원보다 훨씬 낫다던데요. 비디오란
사람이 꼭 조작하고 지켜 있지 않아도
시간과 채널만 맞춰 놓으면 필요한 시간에
자동으로 다 녹화가 된다구요."
나는 그제야 수긍이 갔다. 나는 그 녹화
테이프 한 시간 분을 그 자리에 앉아서 다
보았다. 번호와 이름을 쓴 이산가족들의
애절한 사연이 거대하고 슬픈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 강물 중간쯤에 배순실 사장과
여동생이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이 이삼 분
동안 방영되었다. 배순실 사장의 동생도
언니 못지 않은 빼어난 미인이란 것이
인상에 남았다.
빈손으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까 수사는
신문사에서 하는 것 같던 걸요. 강력한
용의자가 세 사람이라면서요. 그 중 임
기자가 하나 찍으시오, 찍어."
추 경감이 가시돋친 농을 걸었다.
"내게 찍으라면 남편 허벽 사장이라고
하겠는데요. 남자들이야 가끔 여편네가
없어져서 새장가나 한번 들었으면 하는
하이드의 심리가 있다고, 추 경감이 늘
말하지 않았어요?"
마주 대꾸해 주었다. 사실 나도 마음
속으로는 은근히 허벽 사장이 범인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윤준이 범인이라면
사업과 금전에 얽힌 살인이라서 기사로서
너무 통속적이다. 김형자가 범인이라면
기사거리지만 독자의 흥미를 끄는
특종으로선 좀 약하다. '남편이
범인이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기사의
표제로서 그럴 듯할 것 같았다.
나의 취재(실은 수사라고 해야 옳지만)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나는 다시
데스크의 지시를 받고 여의도방송국에
이산가족찾기 취재를 나갔다. 이날은
방송국에서 전에 방송된 부분을 녹화해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아직 못 찾은
사람들에게 재방영해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 내가 갔을 때 화분 살인사건이 나던
날 밤의 프로를 재방영하고 있었다.
나는 배순실 사장 자매의 감격적인 상봉
장면을 한번 더 보려고 그냥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은근히 그 자매의 빼어난 미모를
그 화면을 한참 보고 있다가 나는 정신이
번쩍 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렇다. 자동 녹화를 했다면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사회면
톱기사로 커다랗게 쓰여질 나의 특종기사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며칠 전 임시 수사 본부에서 본, 허
사장이 녹화했다는 장면과 이 방송국의
재방송 장면에서 다른 점을 발견한 것이다.
허 사장의 비디오 테이프에는 없던 9시
1분 뉴스가 재방송 스크린에 나온 것이다.
이산가족 생방송이 한참 나오다가 9시
시보를 알림과 동시에 생방송이 1분 동안
중지되고 9시 뉴스가 나온 뒤 생방송이
다시 계속된 것이다.
분명히 그 9시 뉴스 장면이 없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가 녹화할 필요가 없는
뉴스가 나오자 끊어버리고 생방송이 시작될
때 다시 녹화를 한 것이다. 자동 타이머에
맞춰져서 비디오 자체만으로 녹화됐다면
뉴스 장면이 빠질 수가 없다. 그것은 허벽
사장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겁지겁
수사 본부로 차를 몰았다. 머리에는 온통
특종기사 꿈으로 가득찼다.
반포동 수사 본부 앞에 닿자 뜻밖에도
다른 신문사의 취재차며 방송국 중계차가
잔뜩 와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나는 아찔한 순간을 느끼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둘러싸여 신나게 상황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차 늦었구나."
나는 눈앞에서 특종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범인 허벽은 배순실이
방송국으로 간 뒤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지요. 자기가
이십여 년 전 농락하고 버린 그 불쌍한
다방 레지가 처제라는 것을 텔레비전
생방송을 보면서 알게 된 거죠. 당황한
허벽은 급한 대로 마누라를 죽여서 괴로운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 것입니다.
본인이 모두 자백을 했습니다."
추 경감은 신이 나 있었다.
기자들은 추 경감의 설명이 끝나자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왁자지껄하던 실내는
나는 허탈감에 빠져 우두커니 섰다가 추
경감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허벽 사장의 알리바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사우나탕서 30분을 보냈다는 것
말입니까? 그건 간단한 트릭입니다. 허벽
사장은 3층에서 화분을 떨어뜨려 배순실을
살해한 다음, 비디오 녹화 장치를 9시
50분에 자동으로 끝나게 해놓고 아파트
문을 잠근 뒤 곧 사우나탕으로 들어갔지요.
모두가 텔레비전 생방송에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허벽 사장은 사우나탕에 들어가 모래시계를
2,3분 흐르게 한 다음 거꾸로 세워 놓은
것이지요. 그리고 심부름하는 청년을
불러서 모래시계를 보게 한 것이지요."
얼떨떨한 내 코 앞에 추 경감이 담배 한
대를 내밀었다. 이날도 지독하게 끈끈하고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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