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사람이 가는 지옥 >
새벽 5시. 한여름의 새벽은 훤히 밝았다.
무섭게 끓던 더위는 새벽에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송파대로변에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은파아파트는 이름난 고급맨션이었다.
13동이 모두 남쪽을 향해 언덕배기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옅은 보라색으로
단장한 외모부터가 고급스러움을 잘 나타내
보였다.
제 7동 입구.
"안녕하세요."
현관을 들어섰다.
"예, 안녕하셨어유. 오늘도 몹시
찌겠구먼유."
경비실에서 금테 모자를 벗어 손에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천병일이 벌떡
일어서서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반가워했다.
천 씨의 그 모습은 짝사랑하는 이웃
처녀를 만난 총각처럼 당황하고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쉰 살이 가까운 천 씨한테 그런
순수한 일면이 있었다.
그에 비해 경숙은 파출부답지 않은
멋쟁이 중년이었다. 퍼머가 아닌 생머리
스타일의 세련된 머리 모양에서부터
간들간들한 허리며 쭉 뻗은 양쪽 다리가
소시쩍에 한가락하던 모습을 엿보게 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게 했다.
펑퍼짐한 히프를 일부러 흔들어 보이며
경숙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눌렀다.
천 씨는 수위실 밖으로 나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흘끔흘끔 경숙의 볼륨있는
엉덩이께를 훔쳐보고 있었다.
경숙은 여기서 버스로 서너 정거장
떨어진 성남 쪽의 어느 집 지하에 세를
들어 산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술타령만
하던 남편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이제 중풍이 들어 반신불수로
누워 있다고 한다. 날마다 신경질만 부리며
경숙을 못 살게 하기 때문에 그녀는
새벽부터 밖으로 나도는 파출부 일을 맡아
이 아파트로 새벽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조형래 씨 집에 출근해 아침상부터 봐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머물러 있다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10여 초가 지나자
엘리베이터는 1층에 닿고 스르르 미끄럽게
문이 열렸다.
"악!"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려던 경숙은
갑자기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라
말이 막힌 것이었다.
"사람 살려유."
곧이어 긴 비명을 지르며 경숙이가 수위
천 씨한테로 뛰어왔다. 천 씨는 엘리베이터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직감하고 뛰어가
움직이려는 엘리베이터의 오픈 스위치를
누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쓰러져 있었다. 죽은 뒤 몇 시간이
지났는지 검붉은 피가 옷과 바닥에 엉겨
있었다.
"큰일 났다. 사람이 죽었다. 빨리빨리!"
천병일은 누구에게도 아닌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경비실 전화를 움켜쥐었다.
"사람이 죽었어요. 여자가 엘레베타
안에서 죽었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죽은 여자는 15층에서
혼자 사는 배향림이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광고 디자인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독신녀였다. 대학
국문학과를 나온 뒤 시인이 되겠다고 늘
말해 온 문학도였다.
성질이 활달할 뿐 아니라 퍽
사교적이어서 아파트에서도 인기가 있는
여자였다.
추 경감이 살인사건의 연락을 받고
은파아파트 현장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가
좀 넘어서였다. 어젯밤에 포장마차에서
마신 술이 채 깨지도 않아 그야말로
작취미성의 얼떨떨한 상태로 현장에 와
있었다.
"배향림은 혼자 살고 있었나?"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장
형사를 보고 물었다.
"예. 성북동에 부모들이 살고 있는
본가가 있습니다만, 배향림은 혼자 이
맨션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자기 집을 놔 두고 처녀가 왜 여기
추 경감이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철거덕거리며 말했다. 기름이
떨어졌는지 고물 라이터는 좀처럼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게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짓들입니다. 독립해서 자유롭게 혼자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아무한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죠."
"간섭? 부모가 돌보는 것도 간섭이란
말이야?"
추 경감은 담배불 붙이는 것을 포기한 듯
지포 라이터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배갑에
집어넣으며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요즘 젊은이는 부모로부터 홀로서리를
집에 들어와도 되고, 아침에 늦잠 자도
괜찮고, 때론 보이 프랜드를 데리고 와도
눈치봐야 할 사람 없고......."
"그 여자 부모는 뭣하는 사람들이래?"
추 경감이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조그만 수퍼 마키트
사장이랍니다. 배향림은 2년 전부터 이
맨션에 들어와 있다고 하더군요."
추 경감은 묻기만 할 뿐 강 형사의
대답은 거의 듣지 않고 아파트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배향림의 침실에는 그리 고급으로는 볼
수 없는 싱글베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화장대에는 화장품이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침대 위와
방바닥에는 쉐터며 속옷가지들이 흩어져
"어젯밤 2시에 돌아왔다고 했지?
뭣때문에 처녀가 그렇게 늦게 다녀?"
추 경감이 다시 물었다. 경대 서랍이며
거실의 구석구석을 살피러 다니던 강
형사가 대답했다.
"일거리가 밀려 사무실에 있었답니다.
어젯밤 같이 일했다는 광고회사의 남자
직원한테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12시쯤 됐을 때 웬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2시쯤 퇴근할 것이라고
전화에 대고 얘기를 하더랍니다. 독신
여자한테 밤 12시가 넘어 몇 시에
퇴근하느냐고 묻는 건 보통 사이가 아니란
뜻 아닙니까."
강 형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밤에 같이 있던 남자 직원은 어떤
"예. 디자인을 하는 젊은이인데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혼이라고 하던데요."
"배향림의 주변 인물은 조사를 해
보았나?"
"아직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이 맨션에
사는 남자들 몇 사람과 친하게 지낸 것
같습니다."
"누가 그래?"
"경비실의 천병일이란......."
"그 친구 좀 불러오지 그래."
강 형사가 인터폰으로 천 씨를 불렀다.
30초도 채 안 되어 천병일이 15층의 배향림
아파트로 올라왔다.
"당신이 어젯밤에 배향림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소?"
"예. 제가 봤어유. 2시쯤 됐지유."
"뭔 여자가 이렇게 늦게 집에 오나 싶어
시계를 봤지유."
"배향림은 들어온 뒤 혼자 15층으로
올라갔나?"
"물론입죠. 새벽 2시에 다니는 사람이 또
있겠어유? 배향림 씨는 곧장 엘레베타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갔구만요."
"15층으로 곧장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추 경감이 물었다.
"경비실에 엘레베타 상황판이 있어유.
엘레베타가 통과하는 층과 현재에 머물고
있는 층이 표시되게끔 되어 있어유. 어젯밤
엘레베타는 15층에 배향림을 내려준 뒤
새벽까지 그냥 거기 머물러 있었어유.
아무도 쓰지 않을 때는 마지막 선 층에
천병일은 엘리베이터를 엘레베타라고
말했다.
"그럼 새벽 5시 반 파출부 경숙 씨가
와서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15층에 그냥 서 있었단 말이지?"
추 경감이 다시 물었다.
"예, 그래유."
"그러니까 어젯밤 2시쯤 1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키고 있던 범인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배향림을 죽인 뒤 그대로
두고 사라졌다고 볼 수가 있구먼."
추 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용한 흉기는 뭐야?"
"검시의 말로는 예리한 칼 같다고
합니다. 배와 가슴 등 세 군데를 찔렸는데
심장을 찌른 것이 치명상 같다고 합니다."
"현장에 없었습니다."
"배향림과 특별히 친하게 지낸 사람이 이
아파트에 있나요?"
추 경감이 천병일을 보고 물었다. 천
씨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남의 사생활을 잘못 말했다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아무도 당신이 죽은 사람
흉보았다고 욕하진 않을 거요. 당신이 입을
여는 것은 수사 협조로 범인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돼요."
강 형사가 천병일을 설득시키려고 애를
썼다.
"가깝게 지낸 사람이 몇 사람 있어유.
16층에 사는 강명춘 씨, 15층의 백태균
또 강명춘 씨 사모님......."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 봐요."
"조형래 씨나 백태균 사장님에 대한 건
파출부 경숙 씨가 더 잘 아는데......."
"당신이 아는 것부터 이야기해 봐요."
추 경감은 계속 쭈볏쭈볏 하는 천병일을
독촉했다.
천병일은 단념했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은 배향림과 같은 층에 사는 조형래는
미국서 오래 살다가 왔다고 한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간 집의 외동
아들로 미국회사의 한국지사에 중역으로
나와 있었다.
16층에 사는 강명춘 씨는 30대 초반의
스마트한 회사원이다. 그는 국민학교에서
전자회사의 말단 직원이었다.
키가 크고 눈도 큰 미남형으로 생겨
여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죽은 배향림과는 특별히 가까워 아파트
단지 안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아파트 내의 등산 모임인
은파산악회 간사들이라 자주 만나고 휴일엔
등산도 자주 다녔다.
"글씨 한번은 말입니다......."
천 씨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수사에 도움이 된다니까
말씀인디유...... 한번은 지가 순시를
나가려고 엘레베타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글씨,
엘레베타 안에서 글씨 배향림이하고 강명춘
씨가 뽀뽀를 하느라 서로 부둥켜 안고 문
천 씨는 무슨 죄라도 짓는 듯 옆을
흘끔흘끔 보면서 말했다.
"뭐요? 강명춘 씨와? 그 사람은 마누라가
있다면서?"
강 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마누라 있는 사람은 연애도 못하나유
뭐."
천병일이 강 형사의 말을 반박했다.
"그것을 강명춘의 아내도 눈치채고
있나요?"
"아니지유. 아파트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등잔 밑이 깜깜하다고 그
선생님만은 몰라유. 가평서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쯤 집에
오거든유."
"그리고 백태균 사장은?"
"백 사장님은 쉰이 훨씬 넘어 환갑이
가까운 점잖은 분이여유. 몇 년 전에
상처를 하고 혼자 사시는데 가끔 배향림
씨와 같이 그랜저를 타고 나가는 것을
봤시유. 같은 15층에 사니까 자주
만나는가베유."
천병일의 이야기를 대충 들은 추 경감은
강 형사한테 주변 인물에 대해 더 캐보라고
명령했다.
![](https://blog.kakaocdn.net/dn/bvV3pw/btrJlFrvRnM/9MOoACkKsYxHVNtAVedTF1/img.jpg)
추 경감은 천병일이 지적한 강명춘,
백태균, 조형래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기로
작정했다.
우선 배향림과 같은 층에 있는 조형래의
집을 찾아갔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파출부인 경숙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전 시경 강력계에
있는......."
"형사 나으리시군요. 오케이. 뭐든지
물어보셔요. 미스 배에 관한 것이라면 아는
대로 대답하지요."
조형래는 의외로 시원스럽게 나왔다.
"뭐 별로 물어볼 것이 없군요. 꼭 한
가지만 여쭤 보겠어요."
"예."
조형래가 미소를 띄우며 추 경감의
심각한 모습을 건너다 보았다.
"미스 배와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이웃집, 사이좋은 이웃집이죠."
"옆집에 그냥 살아도 잘 몰랐는데 한
두어 주일 전 동네 테니스 코트에서 인사를
하게 되었지요. 미스 배는 마음씨도 곱고
붙임성이 있어 사람들과 잘 친해져요.
저하고는 최근 레스토랑이나 나이트 클럽
같은 데 몇 번 같이 갔었어요. 그런데 누가
그 아가씰 죽였어요? 나를 용의자라고
생각하나요?"
조형래는 거리낌없이 시원시원하게 말을
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이 용의자라는 건
아닙니다. 집이 아주 잘 꾸며졌군요. 좀
구경해도 됩니까?"
추 경감은 거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급
가구와 진품인 듯한 유명화가의 유화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구경이라고 해도 좋고 수색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절대로 수색은 아닙니다."
추 경감은 목욕탕, 부엌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구석구석이 정갈하게 정리가 잘 돼
있었다.
추 경감은 안방 침실을 맨 나중에 들어가
보았다. 아직 파출부가 정리를 하지 않아
시트가 구겨진 채 침대 위에 얹혀 있고
바닥엔 잠옷이 버려져 있었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창문을 내다보려고 걸어가던
추 경감은 방바닥에 칼이 한 자루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끝이 날카로운 등산용
칼이었다.
칼이 놓인 바닥엔 물컵을 쏟은 듯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칼을 집어
올렸다. 지문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추 경감은 칼을 들고 거실로 나오며
조형래를 보고 물었다.
"이 칼 선생님 겁니까?"
조형래는 손수건에 싸인 칼을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파출부
아줌마한테 물어보죠."
그때 경숙이 마침 거실로 나왔다.
"아줌마 저 칼 우리 거요?"
조형래가 물었다.
경숙은 칼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 칼이 왜 침실에 있죠?"
조형래가 깜짝 놀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럴 리가 있나요. 제 칼도
아닌데...... 어디에 있었습니까?"
조형래가 침길로 들어갔다. 추 경감은
침대와 창틀 사이 칼이 있었던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왜 물이 쏟아져 있습니까? 그 물
위에 칼이 있었어요."
"그것 참 이상합니다. 아줌마, 침실에 웬
물이에요?"
조형래는 오히려 경숙을 보고 물었다.
추 경감은 열린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는 15층. 밖에서는 도저히
칼을 집어넣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어젯밤 몇 시에 들어오셨나요?"
"도어는 잠그고 주무셨나요?"
"물론입니다. 이 집은 카드식 컴퓨터
열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현관문을 열지 않고는 이
방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새벽에 파출부
아줌마가 왔을 때 제가 열었으니까요."
"새벽에 파출부 아줌마가 온 뒤 누구
들어온 사람은 없습니까?"
"없어요. 제가 들어온 뒤 현관문은
자동으로 잠겼거든요."
경숙이가 대답했다.
추 경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칼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옆에 있는 백태균의 아파트로 갔다. 죽은
배향림의 아파트는 1508호, 백 사장의 집은
건너편인 1505호였다.
만나지 못하고 16층의 강명춘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1609호란 조그만 명패가 붙어 있었다.
1609호라면 1509호인 조형래 아파트의 바로
위층이 되는 셈이다.
강명춘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얼떨떨한
채 소파에 앉아 강 형사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제발 우리 마누라한테는 제가 한 말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강명춘은 입술이 타는지 혀를 내밀어
침을 묻혀가면서 사정을 했다.
"아니 강 성생은 미스 배와 등산다닌
일밖에 없다면서 뭘 그렇게 겁을 내슈?"
강 형사가 비꼬듯이 말했다.
"강 선생과 미스 배 사이는 등산다니는
야외에서만 오르나? 방안에서도 산에는
오를 수 있어. 이건 놈담이오, 후후후."
추 경감이 우습지도 않은데 혼자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그러나 저는......."
강명춘도 허탈하게 따라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껴안고 사랑을
나눌 정도면 등산이 문제겠습니까?"
추 경감이 이번엔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건...... 꼭 한 번이었어요. 이 천 씨
영감 그냥 두나 봐라."
"그뿐이 아닌 것 같더군요. 12시가 다 돼
퇴근하는 배향림 씨가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강 선생 아파트에 들렀다가
간다는데....... 밤 12시가 넘어 처녀가
외간 남자 집에 들러 한두 시간씩 있다가
추 경감이 다그쳤다.
"누가 그런 중상모략을 했습니까? 미스
배는 깨끗한 처녀예요."
"글쎄 깨끗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수위실에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상황을 알 수 있는 디지털
상황판이 있지요. 천 씨는 늘 배향림 씨가
밤 늦게 돌아와 어느 층에 내리는가를
유심히 보고 있었지요. 배향림이 탄
엘리베이터는 대개 15층에서 멎지만
일주일에 두 번쯤은 16층에 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한두 시간 후에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여 15층에 와서
선다는군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글쎄요. 16층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겠지요. 그게 꼭 나를 만나러 왔다고
그러나 강명춘은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 칼 혹시 본 적 없어요?"
추 경감이 조형래 방에서 가지고 온 칼을
내보였다. 한참 살펴보던 강명춘이 입을
열었다.
"제 것 같은데요. 등산 다닐 때 가지고
다니는......."
강명춘은 말을 끝내지 않고 거실 구석에
있는 등산 륙색을 들고 나와서 풀어
헤쳤다.
"제 건 여기 있군요."
강명춘은 배낭 속에서 칼 한 자루를 들고
왔다. 추 경감이 들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았다. 꼭 같았다.
"이 아파트에서 이런 칼을 가진 사람이
추 경감이 물었다.
"잘 모르지만 우리 은파 회원은 더러
가지고 있을 겁니다."
"강 형사, 이 칼을 감식과로 넘기게.
지문이나 혈흔 같은 걸 잘 찾아보도록."
배향림 피살사건은 금방 풀릴 것
같았지만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일주일쯤 뒤에 감식과에서 결정적인
보고를 해왔다.
조형래의 침실에서 발견된 문제의 칼에서
혈흔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칼을 물에
ㅆ었기 때문에 지문은 발견할 수 없었으나
혈액형이 AB형인 혈흔을 찾아냈다는
AB형이면 피살된 배향림의 혈액형과
같았다.
그뿐 아니라 부검을 한 검시의가 또
단서를 내놓았다.
문제의 칼로 배향림을 살해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시체에 난 상처와 칼의 모양이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 칼이 범행에 사용되지 않았다면 그와
똑같은 칼이 사용되었으리란 추측이
가능했다.
"조형래가 15층에 내린 배향림을 자기
아파트로 끌고 들어와 덮치려고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자 찔러죽인 게 아닐까요?
그런 뒤 시체를 엘리베이터로 옮겨다
놓았는지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에서 오픈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강 형사가 골똑히 생각에 잠긴 추 경감을
보고 말했다.
"그럼 흉기로 사용한 칼을 물에 씻은 뒤
침실에 가져다 두었단 말인가? 그런 바보
같은 범인이 어디 있겠어!"
추 경감이 나무라듯 말했다.
"그럼 백태균 사장인가 하는 녀석의 짓이
아닐까요? 파출부 경숙의 말을 들어보면 백
사장이 미스 배한테 은근히 마음이 있어
공돈도 집어 주고 값비싼 목걸이도
사다주고 했다는데요. 말을 잘 안
들었거나, 재미를 본 뒤 결혼하자는 등
책임을 지라니까 죽여 버리고 흉기를
조형래 방에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닐까요?"
"그건 말도 안 돼. 우선 칼을 조형래의
침실에 가져다 놓을 수가 없어. 현관으로
높이의 창문에 스파이더맨 같은 사람이라면
기어올라갈 수도 있겠지."
추 경감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경숙이라는 파출부한테 들은
이야긴데요."
강 형사는 바보 같은 소리만 했다고
생각했던지 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 강명춘인가 하는 기생 오래비 같은
젊은이하고 배향림은 아주 붙어 살다시피
했다더군요."
"......?"
추 경감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대단히 호기심이 있는 모양이다.
"경숙이는 원래 조형래 씨 집 일을
봐주러 다니는데, 낮에 한 시간씩은 강명춘
씨의 아파트에 들러 일을 해준다고
2,3시께 그 집에 들러 설거지며 양말 빠는
일 등을 해주고 간대요. 그 집 아파트는
카드열쇠가 아니고 그냥 열쇠인데 열쇠
하나를 아예 파출부가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추 경감이 재촉하자 강 형사가 신이 나서
들은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한 달 전쯤 어느 날 파출부 경숙이
조형래 씨 집 일을 대강 끝내고 강명춘
씨의 아파트로 갔다. 여느 때처럼 문을
따고 들어서자 어디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파출부는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거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참으로 희한한
소파 위에서 강명춘이 발가벗은 채 한참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배향림은 이제 막
엑스타시를 경험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고,
강명춘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배향림을
공격하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람!
경숙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파출부 경숙은 그와 비슷한
광경을 조형래의 아파트에서도 발견했다는
것이다.
열흘쯤 전 언제나처럼 새벽 5시 반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 복도에 내렸는데
배향림이 잠옷 차림으로 조형래의
들어가더란 것이다. 새벽 5시에 처녀가
독신남자 아파트에서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 참 맹랑한 아가씨군. 아래 위층에
애인을 두고 즐겨?"
추 경감이 괜히 분해서 입술을
실룩거렸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겁니까? 정 이러시면 무고죄로 당신들을
고소하고 말겠어요."
강 형사를 따라 들어온 강명춘은 서슬이
퍼래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채우고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강 형사가 강명춘을 추 경감 앞에 앉히고
담배를 피워물며 말했다.
"강명춘 씨, 당신은 살인 및 시체유기
혐의로 구속합니다."
추 경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라구요? 허허허."
강명춘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두 손을
벌리고 웃었다.
"왜 죽였어요?"
"누가 누굴 죽여요?"
"배향림을 왜 죽였느냐니까. 유부남이
처녀를 실컷 농락한 뒤에 결혼하자니까
귀찮아서 죽여 버린 것이지? 그리고
조형래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칼을
조형래의 침실에 집어넣은 것이지?"
것 같았다.
"걔는 본처하고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하는 그런 치사한 여자가 아니예요.
즐길 때는 서로 부담없이 즐기고 돌아서면
남이 되는 그런 깨끗한 아이예요."
"아래 위층에 애인을 두고 즐기는데
깨끗한 여자야? 요즘 젊은이들의 모럴은
그런가?"
추 경감이 주먹으로 강명춘을 쥐어박을
듯이 하며 말했다.
"경감님. 생각해 보세요. 미스 배는 그날
밤 2시쯤 돌아와 15층에 내린 뒤
피살되었습니다. 저하고는 만난 일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제비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칼을 조형래의 침실에 가져다
놓습니까?"
새도 모르는 꾀를 생각해 냈지만, 나를
속이진 못해. 당신은 그날 밤 배향림 씨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몇 시에
퇴근하는가를 물어서 알아냈지. 그리고
새벽 2시께 복도에 가서 배향림이 오기를
기다렸던 거야. 마침내 배향림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배향림을 칼로 찔러
쓰러뜨렸지. 그리고 계단을 통해 16층 당신
방으로 돌아가 칼을 대강 씻어 지문을 지운
뒤 그것을 바로 아래층에 있는 조형래 씨
침실에 집어넣었지."
"말도 안 됩니다. 제가 뭐
오랑우탕인가요? 아무리 바로 아래층이지만
칼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칼에 실을 매가지고 늘어뜨린 뒤
끝이 났다.
들어가게 한 것이지."
"그럼 그 실은 조형래 씨가 풀어
주었습니까? 아니면 칼에 실이 묶여
있었나요?"
강명춘이 비웃듯이 말했다.
"실 대신 물이 고여 있었지. 얼음 녹는
물 말이야. 당신은 얼음을 길죽하게 얼려
가지고 칼자루와 함께 실에 묶은 뒤 아래층
방안에 집어넣었어. 한참 뒤 얼음이
녹았겠지. 얼음이 녹으면 묶었던 실은
헐거워져 그냥 빠져나오게 돼. 방바닥에
물이 묻어 있었던 건 그 때문이야."
"지독하군요."
강명춘은 마침내 항복을 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등산칼과 꼭 같은
것을 하루 전날 단골 등산용품 가게에서
죽였어?"
추 경감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말했다.
"그런 여잔 죽어야 합니다. 날 배신하고
15층의 조형래라는 사기꾼 놈을
좋아하다니요. 처음엔 말로
타일렀습니다만, 그 연놈은 말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두 사람을 다 지옥에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 낸 거죠."
추 경감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감님, 이 사건을 모리무리 세이찌라는
작가가 쓴 <인간의 증명>이란 추리소설과
비교해 봤어요? 엘리베이터 속의 살인 사건
말입니다."
강 형사를 내려다보며 추 경감이
대답했다.
"자네 이제 추리작가가 되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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