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팽의 손 >
보름 만에 장마가 끝났다. 창문 너머로
오랜만에 보이는 쾌청한 하늘 아래 도시는
기지개를 켜듯 활기차게 일어났다.
편집실로 막 들어선 수진의 귓가에
바하의 칸타타가 들려왔다. 사장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오늘도 사장은 신과
음악에 대한 경건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창문 옆의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버릇처럼 신문을 펼쳤다. '보름달
살인사건, 제5의 용의자는 누구?'란 굵은
활자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보름날이구나.
피해자는 모두 인텔리의 직장 여성 내지는
대학 강사들. 목을 졸린 채 강간의 흔적이
보이는 그녀들이 시체로 발견된 날이
공교롭게도 모두 보름달이 뜬 날이어서
매스컴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이
세인의 관심을 끌어 모은 데엔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건의 참혹함과는
달리 피해자에게서 별다른 저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그런 폭행을 피해자는 오히려
즐긴 듯했다.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 신문에는 하늘조차 오늘 밤에
벌어질 또 하나의 살인극을 준비하기 위해
그 길고도 긴 장마를 끝냈다고 논평하고
있었다.
넘겼다. 그녀에게 이런 사건은 하등의
흥미거리도 못 되었다. 아니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들에 그녀는
무관심했다. 이를테면 이번 홍수에 몇십
명이 익사했나, 후기 리그에 우승할
프로야구팀은 어느 팀인가, 다음 대통령
선거는 언제쯤인가 따위.
문화면을 펼쳤다. 올 가을에 내한할 소련
연주가의 프로필이 나와 있었다.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그 위대한
쇼팽의 전문가가 오는구나. 자리를 고쳐
앉으며 그녀는 그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이것이 그녀의 관심사였다. 아니, 유일한
삶의 즐거움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채
30평 남짓한 조그마한 편집실조차
월 발행부수가 고작 1만 권도 안 되는
초라한 음악 전문지. 취재기자라고는
그녀를 포함한 세 명. 월세는 석 달째 밀려
있고, 폐간이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책상이 차지한 한 평도 안 되는 이
공간이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표면적으로
서른두 살의 이 노처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서랍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소련
연주가의 이름과 방한 날짜를 또박또박
메모했다. 그는 이 소식을 알고 있을까?
나의 귀여운 쇼팽광(狂)....... 또다시
미소가 저절로 입가에 번졌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죠?"
어느새 사장이 다가왔다.
"신문 읽으셨어요?"
"쇼팽 전문가가 온다고 그러죠? K씨가
좋아하겠군요."
"지금쯤 펄쩍펄쩍 뛰고 있을 걸요?"
"참, 그 양반 이번 달 원고 제출했나요?"
"오늘 점심때 갖고 오기로 했어요."
"그러면 원고마감 끝낼 수 있겠죠?"
"네."
"이번 달에도 수고 좀 해주세요."
사장실로 들어가며 그가 말했다.
10년째 입는다는 낡은 양복이 풍채 좋은
그의 몸을 소박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놓았다. 모닝
커피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신문에서 커피,
그 다음엔 전화통 순이었다. 소위
음악평론가니 교수니 하는 작자들이 전화통
너머로 고루한 이야기를 잔뜩 준비한 채
지리멸렬한 전투에 앞서 모닝 커피는
그녀의 피난처였다. 되도록 느릿느릿
그것을 마실 작정이었다.
실내는 썰렁했다. 마감 탓인지 기자들의
출근이 늦었다. 전날의 야근과 과음
탓이리라. 커피잔에 기신기신 커피 가루가
피어오를 때, 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들어섰다. 후줄근하게 걸친 낡은 점퍼에서
피곤이 묻어 나왔다. 두리번거리더니
수진의 자리 옆으로 그가 다가왔다.
"저...... 여기가 A잡지사죠?"
그가 물었다.
"네. 그런데요......?"
그녀가 되물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한(韓) 사장님 계신가요?"
"저......."
그가 주저하더니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녀의 눈앞에 빠르게 경찰 신분증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경찰에서 나왔는데요......."
"아, 예......."
그녀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별거 아닙니다."
그가 눈치채고 재빨리 말했다.
"그저 몇 가지만 여쭤 보면
되니까요......."
이상하게 기분 나쁜 사내야. 한껏 공손한
체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문득 그녀는
자기의 가슴에 와 닿은 그의 시선을
느꼈다. 황급히 그가 시선을 돌렸다.
블라우스의 앞자락이 열려 있었다. 화끈
"혹시 K씨란 분 아십니까?"
"글쎄요......."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K씨라면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다. 이 잡지에 정기적으로
비평을 쓰는 젊은 음악평론가가 아닌가.
"몇 번 인사는 하기는 했어도 아직
잘......."
거짓말에 그녀는 아마추어였다.
"그럼 사장님 좀 뵙게 해주세요."
그가 눈치를 못 채고 말했다.
"지금 안에 계세요.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그녀가 사장실 문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그가 사라졌다.
바보 같애....... 그녀는 재빨리
앞단추를 여몄다. 짐승 같은 그의 눈초리가
듯싶었다.
그녀가 책상 위에서 가방을 치우는 순간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침부터 실수 연발이구나.
그녀는 재빨리 깨진 조각을 긁어 모으며
혀를 찼다.
10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궁금해졌다. 언뜻
보름달 살인사건이니 K씨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K와 경찰, 암만 둘을 연결시키려 해도
우스꽝스러웠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마른 기침을 하는 깡마른 사내. 그가 바로
K다. 쇼팽에 흠뻑 빠진 이 시대착오적인
로맨티스트한테 경찰이라니. 그녀는 웃음을
빽빽하게 서가에 꽂힌 레코드. 사장이
평생 모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자료실은
음악에 대한 사장의 애정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쇼팽의
녹턴(Nocturne:야상곡)이라....... 수진의
손이 서가를 가로 질렀다. 피아노 소나타
항목 어귀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두꺼운
비닐에 싸인 원반이 한 장 서가에서 빠져
나왔다. 소련 연주가의 실황으로 녹음된
녹턴 연주였다. 애호가들 사이에 명연으로
꼽히는 음반이기도 했다.
막 플레이어에 판을 올려놨을 때, 그녀의
뒤에서 가벼운 기척이 났다.
"그것은 내가 막 서장으로 진급했을 대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곧 실내에
부드러운 피아노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다른 연주자들과는 달리 터치가 강한
걸요. 남성적인 힘이 넘치는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흔히들 쇼팽 하면 생각하는 부드러움,
기교, 여성적인 성격....... 그런 의미에서
이 연주는 쇼팽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요."
"저......."
그녀가 주저하며 말했다.
"아까 오셨던 분이......."
"마침 내가 근무했던 곳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사장이 말했다.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참, 그 친구 원고를 이따 받기로 했죠?"
"네."
"그럼 수고해 줘요."
사장이 헛기침하며 사라졌다.
별일 아니다...... 그런데 사장의 표정이
왜 저렇게 어두운 것일까? 원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격 때문일까. 하긴 경찰관
생활을 20년씩이나 했으니.......
그렇지만 K가 아주 정상적인 사람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진이 보기에는 그랬다.
불과 스물다섯에 그토록 예술과 음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소유한 점이 우선
그렇다. 남들은 평생 걸려야 터득할 지식을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습득한 것이었다.
생활방식 또한 미심쩍었다. 지독한
비밀주의, 과묵한 태도, 신비스런
의미란.
한 달 전쯤에 수진은 그의 아파트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우선 거실 사면을 꽉
채운 장서, 디스크, 오디오 시스템 등에
그녀는 주눅이 들었다. 게다가 먼지 한 톨
찾기 힘들 정도로 정결한 상태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그렇게 잔뜩 위축된 그녀를 단숨에
긴장에서 풀어준 것이 하나 있었다. 그의
첫돌 사진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알몸으로
해바라기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
사진에 넋이 빠져 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도록 그녀의 목덜미에 다가온
것이었다. 느낌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등뒤에 있어서
성적인 충동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었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의 품에 쓰러지고 싶었다. 순간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식사하지 않을래요?"
그가 돌아서서 부엌으로 가면서 말했다.
허청허청 거실을 가로질러 그녀는 그만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순간만 생각해도 수진은 몸이
달아올랐다. 성적인 경험에 관해 그녀는
초보자가 아니었다. 연전에 어떤 사내하고
6개월간이나 동거한 일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K가 전해주는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모성애를 자극하는 처량한 눈길,
국민학생처럼 단정한 옷차림, 세상 물정에
그의 얼굴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녀
특유의 연하(年下) 취미가 그를 볼 때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미심쩍게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수첩! 그것을 그녀는 그날
그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 안에
깨알같이 적혀 있던 여자들의 성명과
전화번호들. 카사노바의 수첩조차 이보다는
못했으리라.
K의 여성 편력엔 나름대로의 결벽증이
있는 듯했다. 같은 여자와 두 번 이상 깊은
관계를 갖지 않기. 수진이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엔 그녀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데이트 현장을 여러 번
목격했다. 주로 음악회에서였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의 파트너가 바뀌는 것이었다.
멍해졌다. 보름달 살인사건!
형사의 방문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장실에서 분명히 K와 보름달
살인사건을 연관지어 말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녀의 뇌리에 E여대 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독일에서 음대를 나온
미모의 그녀는 K의 최근 파트너였다.
음악회에서 수진도 그녀를 본 일이 있었다.
그녀는 죽었다. 바로 한 달 전에.......
수진은 그녀의 사인을 몰랐다. 아니 원체
그런 일에 무심해 그녀만 모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신문을 뒤져보자. 불과 한 달 전이
아닌가. 만일 그녀가 보름달 살인사건의
제4의 희생자라면.......
수진은 서둘러 신문 파일을 뒤졌다.
비디오 테이프를 리와인드(Rewind)시키듯
18일, 17일, 16일...... 그 달의 보름은
12일이었다. 13일이 지나고 12일이 나왔다.
사회면을 펼쳤다. 맨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갔다. 왼쪽 귀퉁이에 만화가 눈에
띄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보름달
연쇄 살인극......'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뛰었다. 손끝에서 신문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30분씩이나 바람 맞혀도 되는
거예요?"
돌아보니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밝은
미소의 K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카페 안은
썰렁했다. 비록 중심가에서는 멀리
점심시간만 되면 인근 음식점과 다방에
줄을 서는 곳이 바로 이곳 잡지사가 있는
데였다. 수진의 실수가 다행이었는지,
그들은 느릿느릿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가롭게 마실 수 있었다.
카페 주인은 일년 내내 뜨게질만 하는
여자였다. 막 중년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인상이 수진은 좋았다. 수진만 들어서면
무언의 약속처럼 그녀는 쇼팽의 피아노곡을
틀었다. 느릿느릿 실타래를 풀듯 쇼팽이
흘러나왔다. 버릇처럼 수진은 창가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공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찬 공이 높이
하늘로 솟구쳤다.
"옛날엔 저도 축구를 무척 잘 했습니다."
존재를 의식했다. 웃음이 나왔다.
"센터 포워드란 포지션을 아시죠? 한때는
윌 동네의 골 게터 노릇을 단단히 했었죠."
여전히 핼쓱한 얼굴빛, 깡마른 몸매,
신비스런 미소...... 아이 같애. 그는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고 있다. 아이는
착하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담......수진은 그의 미소에 또다시
녹아내려갔다. 촛불처럼. 그가 준
원고뭉치를 그녀는 꼭 쥐면서 말했다.
"혹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으세요?"
"어떻게 아셨죠?"
그가 되물었다.
"손가락을 보고 알았어요."
그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꼭
쇼팽의 손 같았다. 어느 사진책에 나왔던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었죠. 도중에 사고로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그만뒀지만......."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가 막 쇼팽을 칠 때였습니다."
"장갑을 끼고 다니는 버릇을 그때 생겼던
모양이죠?"
그녀가 물었다. 그는 늘 부적을 갖고
다니듯 검은 장갑을 꼭 끼고 다녔다.
"손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그가 멋적게 웃었다.
"자녀 교육에 광적이었던 저희 어머님의
착상이었죠. 그것이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려
고치려고 해도 잘 안 되더군요."
그가 품에서 장갑을 꺼냈다.
일어났다. 그가 반쯤 일어서다 말고
주저하듯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그 눈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저...... 이따 저녁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의심과 불신에
시달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손을 보면 안다. 여리고 가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난 정말 엉뚱한 생각을 했었어.
수진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힘없는 여자의 목을
조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슴이 뛰고 호흡이 빨라졌다. 그의
번에 못 이룬 일을 그는 오늘 저녁으로
연장시킬 것이다. 그녀는 다리를 모아 힘을
주었다. 하복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거침없이 올라왔다. 이마에 땀이 보송보송
맺혔다. 온몸에 힘을 줬다가 일시에 푸는
방법. 이것이 그녀가 긴장을 쫓아내는 데
쓰는 방법이었다. 블라우스 자락을 열고
가슴에 손을 넣었다. 아직은 쓸 만했다.
통통하게 살찐 유방이 손아귀에 묵직하게
잡혔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하얀 타일로 벽을 장식한 이곳 화장실,
야근이나 특근일 때, 그녀는 이곳에 혼자
들어와 십 분씩 이십 분씩 앉았다 가곤
했다. 피곤하거나 긴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어느 정도 기분이
안정되는 것이었다. 혼자만 있다는 안도감
내려가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편집실에 들어갔다. 마감에 쫓긴
기자들이 하품을 참으며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수진은 시계를
쳐다봤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도 큰
바늘이 세 번 반을 돌아야 한다. 그녀가
대여섯 번 화장실을 들락거린 사이에도,
시간은 정체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음만 급해졌다.
늙은 평론가의 장광설. 어느 애독자의
문의사항. 그리고 또 한 번의 화장실.
그래도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하이힐이
바닥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화기를 든 채 다리를 흔드는 자신을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정신차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시계 바늘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때 누가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올려다보았다. 아침의 그
형사였다. 그가 품에서 천천히 검은 장갑을
꺼냈다. 놀라는 그녀에게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https://blog.kakaocdn.net/dn/D5EBO/btrJj5LlHcS/4k6H512VOoHdAphpJzkWH1/img.jpg)
책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판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이리저리 바닥을 뒹굴었다.
갑자기 오디오 시스템이 폭발했다.
자료실이 나에게 덮치고 있다.......
그녀는 눈을 떴다. 손끝에 신문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감고 본 환상보다
눈을 뜨고 본 현실이 더 무서웠다. '미모의
여자 강사, 제 4의 희생자로......'란
기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눈을 다시
할지 그녀는 난감해졌다.
E여대 강사는 죽었다. 강간과 교살.
보름달 살인사건의 연속된 희생자였다.
그리고 형사의 말을 빌자면 그 범인은
K였다. 수진은 신문을 산산조각 찢어
버리고 싶었다.
"이 사건의 해결은 오로지 수진 씨한테
달려 있습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했다고는 하나, 이 장갑만 가지고는
체포가 불가능합니다. 오늘 밤 그 사람하고
저녁 약속을 했다고 그러셨죠?"
수진의 귀에 형사가 한 말이 울려왔다.
"그는 분명히 식사 후에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자고 할 겁니다. 적당히
으슥한 곳에서 차를 세우겠죠. 키스하는 척
목을 조를 겁니다."
달린 조그마한 플라스틱 물체가 만져졌다.
"바로 그때 그걸 누르세요. 그럼 그걸
신호삼아 제가 나타날 테니까요."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다시 한 번
의심을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서 장갑이
발견됐다고 해서 꼭 K가 범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 여강사가 만나는 남자가 K 한
명뿐이라는 보장도 없다. 모두가 억지로
꾸며낸 말일 뿐이다. 음흉한 눈초리에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그 사내가
지어낸 말일 것이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다.
심리 상태에 따라 그 흐름은 달라진다. 좀
전만 해도 한 곳에 멈춰 움직일 줄 모르던
것이 이토록 빠르게 흐르는 까닭은
내쉬었다. 봇물 터지듯 흐르는 시간. 누가
그 격렬한 운동을 멈출 수 있겠는가. 반
바퀴만 시계 바늘이 돌면, 이제는
약속장소로 가야만 한다. 더 이상 유보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코너에 몰린
복서처럼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사람의 신체는 80퍼센트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달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거죠."
K가 말했다.
"여성이 주기적으로 치르는 생리나
조울증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K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화제를 찾아내 신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수진은 의아해졌다.
"범죄와 달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보름달이 뜰 때 인간의 범죄심리가
증가한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아뇨."
"뉴욕 시경의 보고서에 기록된
자료입니다."
"우스워요."
"뭐가요?"
"사람이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이요."
"로보트 같다는 말이군요."
"우습지 않아요?"
"수진 씬 시인의 마음을 갖고 있군요."
"그건 무슨 뜻이죠?"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뜻이죠."
"어머."
웃음이었다. 그 웃음과 함께 한껏 쌓아
두었던 긴장이 일시에 날아가 버렸다.
그가 포도주를 따뤘다. 흰 액체가
투명하게 잔을 채웠다. 그녀는 그것을 죽
들이켰다. 석 잔째였던가 넉
잔째였던가....... 혀 끝에 감미로운
향기가 남아 기분을 느긋하게 만들었다.
그가 다시 포도주를 따뤘다.
높은 칸막이로 가리워진 어두컴컴한
좌석. 분명 실내는 만원이었을 텐데, 그
흔한 웅성거림조차 들리지 않았다. 밀폐된
곳에서는 사람의 심리까지도 폐쇄적으로
변해 버리는가. 한쪽 구석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투른 솜씨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문득 수진은 K를
돌아보았다. 피아니스트에 가 있는 그의
보였다. 좌절된 꿈....... 그에게서
느껴지는 매력, 인생사 모두 포기한 것
같은 태도는 모두 좌절된 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그녀 또한 경험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때는 화가가 되고
싶었고, 연극 배우가 되고 싶었고,
프리마돈나가 되고 싶었고....... 그러나
이젠 삼류 잡지사의 말단 기자. 초라하게
전락해 버린 자기 신세에 암만 저주를
퍼붓는다고 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그녀는 다시 술잔을 입에
댔다. 꿈결같은 액체가 몽롱하게 혀를
적셨다. 손가락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번이 다섯 잔째다.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그 사이 시간은 세 시간이나
흘러 버렸다.
바라보고 있다. 그 눈길조차 변함없는 채.
문득 그녀는 그의 뒤 칸막이에 앉아 있는
형사를 발견했다. 그는 정신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굼뜬 동작으로 포크며
나이프를 쓰는 모양이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무척 배가 고팠을 거야....... 세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렸을 테니. 수진은
웃음이 쏙쏙 나오는 것을 꾹꾹 눌렀다.
술에 취하면 웃음이 헤퍼진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내가 꼭 그 꼴 났구나.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언뜻 한구석에 어떤 중년
사내와 함께 있는 사장을 본 것 같았다.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본 것 같았다.
술에 취하니까 별 환영이 다 보이는구나.
황급히 수도물을 틀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시원했다. 취기가 빨리
사라졌으면 싶었다. 이젠 어떤 환영을 보게
될까? 사장하고 K하고 한바탕 탱고라도
추는 것은 아닐까. 또 웃음이 나왔다. 다시
물을 끼얹었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였다. 한모금 길게 빨자 조금씩 정신이
맑아졌다. 차근차근 수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내 이름은 뭐지. 내 직업은
뭐지. 난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하나하나 답을 했지만, 그럼에도 맨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난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사이로 드러난 볼품없는 얼굴에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질문
하나. 넌 누구니. 다시 묻는다. 저기 서
있는 깡마른 노처녀는 대체 누구냔 말이야.
단 한 번의 사랑에 실패하고, 자신이
쌓아둔 성(城) 속에 꼭꼭 숨어서 청춘을
날려 보낸 저 보잘 것 없는 술 취한
노처녀는 곧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막 안으로 들어서던 사람과
아슬아슬 부딪칠 뻔했다. 올려다보니
K였다.
"괜찮으세요?"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둘러보았다. 한구석에 앉아 있던 사장도,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던 형사도 보이지
않았다.
"하도 안 나오길래 걱정이 돼서
왔습니다."
그의 눈길이 진지해졌다.
"괜찮아요."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비좁은 복도, 서투른 피아노 음악,
흐릿한 백열등이 천장에서 깜빡거렸다.
그는 앞을 가로막듯 그녀에게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밀치고 나가고 싶었다.
K라는 사람에 대해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순간 이마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예의
그 숨결이.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가슴을 진정시키려 해도 하복부에서 거칠
것 없이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기는 용서
없이 온몸을 달구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뜨겁게
그녀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심호흡을 했다.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이토록 심한
열기를 어떻게 진정시킨단 말인가. 저항을
포기하자 모든 것이 덤덤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긴 시선 교환. 이어지는 침묵.
정사진처럼 마주선 두 사람은 영원히 그
부동(不動)을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키스하고 싶어....... 그녀가 느낀 순간
천천히 그가 입을 열었다.
"찬바람이나 쐴 겸 밖으로 드라이브나
마지막에 마신 술잔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K의 권유에 못 이겨 잔을
비우기는 했지만, 이처럼 사정없이 취기가
몰아닥칠 줄은 몰랐다.
혹시......? 그녀는 몽롱한 가운데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가능할 것
같았다. 암만 그녀가 술에 약하다지만,
이렇게까지 기운이 빠진 적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 운전석에 앉은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약을 탔을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긴장과 공포가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었다.
강변도로의 긴 직선 코스를 따라 K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그 속력에 부응하듯 카 스테레오에서
감미로운 쇼팽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왔다.
현란한 기교에서 우러나오는 선율이 마치
나비가 너풀거리듯 비좁은 차 안에서 춤을
추었다.
마치 영원을 향해 뻗은 것처럼 끝없이
이어진 도로. 자정을 넘어선 이곳에는
달마저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웠고,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조차 그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자취를 감춘 이 밤에 홀로 질주하는 한
대의 승용차, 그 속에 살인자와 단 둘이
있는 술 취한 나. 키득키득 그녀는 웃음이
호주머니 속의 스위치를 누르지 뭐. 그 큰
소리에 잠든 모든 사람들은 깨고 말걸.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한 점 불빛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분명 형사가 운전하는
자동차야. 그녀는 그렇게 믿어 버렸다.
"지금 수진 씬 무슨 생각 하세요?"
어둠 속에서 K가 물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겨우 그녀가 말을 했다.
"전 옛날 생각을 좀 했습니다."
"첫돌 때 생각?"
킥킥 그녀가 웃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제 어렸을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주위에서도 소질이 있다고 많은 기대를
그가 카 스테레오의 볼륨을 조금
낮추었다.
"한참 피아노에 빠져 쇼팽의 곡을 연주할
때쯤 되자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갓 귀국한 30대
초반의 여자였죠. 물론 노처녀였구요."
노처녀라...... 내 나이 또래? 그녀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 그녀가 좋았습니다.
짝사랑을 한 거였죠. 그때 제 나이가
열여섯. 꿈같은 시절이었죠."
여전히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하고 야외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자가용을 타고
말이죠. 태양이 기분좋게 내리쬐고,
곁눈질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런 내 모양을
그녀 또한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옆집에 사는 중3짜리 소년을
보면 마구 가슴이 뛰었거든. 무척 귀여운
미소년이었어. 갑자기 잃어버린 추억이
다시 솟아나는구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전 용기를 내어 운전하는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길고 하얀 손이 부드럽게 제
손아귀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빼내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전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한껏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그랬더니 그녀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눈을 떴다. 목이 말랐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시원한 바람을 쐬었으면
싶었다.
"그녀는 잠시 멍해지더니 이윽고
깔깔거리며 웃더군요. 조그만 녀석이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알밤까지 때리는
거였습니다. 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창피해졌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 진심을 몰라주는 그녀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지는 거였습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차의 속력이 점점 빨라졌다. 도로의
오른쪽으로 낀 강변을 향해 곤두박질할
것만 같았다. 놀란 수진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유리창에 가 닿았다. 차가
곧 추락할 것만 같았다. 황급히 뒤를
희미하게 뒤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바로 그때 앞에서 거대한 트럭이
달려왔습니다. 비좁은 시골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속력을 늦추고 비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가 뭘 했는지
아십니까?"
그가 흥분에 싸여 말했다.
"운전대에서 그녀를 밀어 내고, 달려오는
트럭을 향해 방향을 돌린 거였습니다."
차가 기우뚱했다. 타이어의 마찰음이
거칠게 났다.
"조심해요!"
있는 힘을 다해 수진이 소리쳤다. 황급히
K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급경사로 커브가
나 있는 절벽 앞길에서 차가 정거했다.
굴러 떨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긴 한숨을
쉬며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우리가 탄 차는 산산조각이 나
부서졌습니다. 큰 사고가 난 거였죠.
그녀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전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결과 영영 손을 못 쓰게
되어 버려 피아니스트가 되려던 저의 꿈도
날아가 버렸고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흐느끼는 것 같았다. 그 흐느낌에
그녀는 다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의 고백은 진실한 것이리라.
진실은 함부로 발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의 숨은 과거를 고백할
정도로 날 신뢰하고 사랑한단 말인가. 그가
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보다 동정심이
그리고 어지럽다. 조그마한 스피커 안에서
쇼팽은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감미로운 선율.......
문득 그녀는 검은 장갑을 낀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힘없이 운전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나직이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구름 낀 하늘 아래 수풀로 둘러싸인
공터에는 암흑만 가득했다. 근처에 흐르는
강물은 막 끝난 장마 탓인지 나직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수진의 거친 신음소리
외에는 주위는 고요했다.
그녀의 목덜미를 K의 입술이 애무해
갔다. 브래지어 위로 주무르는 그의 손
아래 그녀의 유방은 터질 듯이 팽창되어
그의 무릎이 헤집고 들어왔다. 아무리
저항을 해도 그녀의 하복부에 그의 무릎이
밀착되어 문질러 대자 그녀는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땅바닥에 그녀를 누였다. 몸을 실어 왔다.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입술을 벌리자 그의 설육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그것을 세게 빨았다. 놀라운 쾌감이
몰아닥쳐 왔다. 흥분으로 인해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돼. 다시 그녀는 다리를
모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리 발버둥질쳐도 하나도
기력이 나질 않았다.
그의 애무는 너무나 집요했다. 앞자락을
유방이 봉긋 솟아나왔다. 갑자기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거칠게 그것을
핥았다. 또다시 쾌감이 밀려왔다.
바람 한 점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문득 그녀는 쾌감에서 깨어나
인기척을 살피기 시작했다. 호주머니 속의
스위치를 누를까. 형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그와 나는
단순한 정사만 벌이고 있지 않은가. 순간
그녀의 하복부에 그의 손길이 다가왔다.
거칠게 쓰다듬자 정신이 몽롱해지고, 모든
잡념이 날아가 버렸다. 스커트 자락이 둘둘
말려 올라 가면서 희미한 달빛 아래 그녀의
허연 허벅지가 온통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
그녀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해......."
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사랑해. 죽도록......."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목 언저리에
다가왔다. 섬뜩했다. 별안간 올가미처럼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콱
막혔다. 그녀가 몸부림쳤지만 장갑을 낀
그의 두 손은 찰거머리처럼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저항은 그저 시늉일
뿐, 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그녀는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죽으면 안 돼. 번쩍 정신이 든 순간
그녀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물체가 만져졌다. 힘껏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질 않았다. 다시
눌렀다. 조용했다. 갑자기 깊은 절망감이
순간 가까운 데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K의 손에 힘이 줄어들었다. 그
형사일까. 그녀는 힘껏 K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때 누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K의
몸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또 다른 몸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녀는 눈을 겨우
뜨고 누군가 바라봤다. 물씬 술 냄새를
풍기며 벌겋게 상기된 형사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암만 눌러도 소용없을 거야. 원래
소리가 나지 않는 거니까."
어느새 빼냈는지 그의 손에 플라스틱
스위치가 들려 있었다.
"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따라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나도 지를 줄 알아.
하하하...... 더 크게 질러 보시지?"
"다......당신은 혀......형사가
아닌가요?"
가까스로 그녀가 물었다.
"형사는 무슨 형사."
그녀의 허벅지를 애무하며 그가 말했다.
"경찰서 문턱에도 못 가 본 사람한테.
하하하......."
"다......당신은 누......누구예요?"
너무 놀라서 이젠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건 저 친구한테 물어 보시지 그래?"
그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K를 올려다 보았다. 어둠 속이라
서 있는 그의 등뒤로 나뭇가지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이봐, 내가 먼저야. 차례는 지키자구."
사내는 K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그가 대꾸했다.
"하긴 자네는 계집 따위에 관심이 없을
테니까......."
그가 몸을 덮쳐 왔다.
수진은 온 몸을 다해 발버둥질쳤다. 있는
힘껏 비명도 질렀다. 공포에 온몸이 굳어
갔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가냘픈
허우적거림일 뿐이었다. 그가 거칠게
따귀를 때렸다. 양쪽 볼에서 불꽃이
튀었다.
"썅, 가만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냅다 그의 손이
가슴을 헤치고 들어왔다. 다시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K의 손이 목을 졸랐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숨이
막혔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사내가 마구 옷을 찢는 소리가
멀리에서 아득히 들려왔다. 난
죽는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자신이
파묻혀 가는 것을 느꼈다. 순간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최후의 힘을 내어 그녀는
눈을 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하늘뿐이었다. 게슴츠레 열린 눈동자에
구름을 헤치고 나타나는 보름달이 보였다.
그러자 K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했다. 창백하고 싸늘한 그의 얼굴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까이에서 들리던
인기척 소리가 순간 사라져 버렸다.
눈을 떴다. 주위가 환했다.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사방에서 눈부시게 비추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그녀는 수풀 속에 누워
있었다. 난 살아 있는 걸까. 그렇다면 저
불빛은.......
"이제 정신이 들었군요."
사장의 환한 얼굴이 불빛 속에서
나타났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찢겨진 옷 사이로 새하얀
알몸이 온통 드러나 있었다. 사장이
그녀에게 모포를 씌워 주었다.
"괜찮아요?"
그가 물었다.
"여긴 어디예요?"
그녀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다 끝났으니 안심해요."
그가 토닥거리며 말했다.
"다 끝나다니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풀 너머로 대기한 경찰차 무리가
보이고, 그제서야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수갑에 차여 고개를 떨군
K와 사내가 형사들 틈에 보였다.
"모든 게 다 해결됐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사장이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습니까?"
한 사내가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장과 같이 있었던 중년 남자였다. 그녀는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고, 목이 저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가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수진
씨에겐 미안하지만, 아침에 형사랍시고
찾아온 사내가 암만해도 미심쩍어 쭉 수진
씨 뒤를 밟아 왔었죠. 이래뵈도 경찰 생활
20년인데 그런 사이비 하나 못 가려낼 줄
알아요?"
사장이 말했다.
"마침 이 친구가 제보를 하더군요. 연쇄
살인극에 골머리를 앓던 참이라 밑져야
본전인 셈치고 미행을 한 거죠."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이 친구하고 동기였죠. 지금 P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서장이지요. 곧 은퇴할
예정이지만."
사장이 덧붙였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다. 그녀는
일어섰다.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사장이
부축을 했다. 그녀는 모포자락을 움켜쥐고
경찰차가 있는 곳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한구석에 정차한 차 뒷창으로 K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K는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그의 무표정함은 가장 깊은 좌절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한 발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어요."
사장이 말했다.
"저쪽으로 갈까요?"
사장이 끄는 대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K는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에 올랐다.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직도 목이 저렸다. 손으로
주무르면서 문득 그녀는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보였다. 먹구름이
조금씩 밀려오더니 곧 보름달을 삼켜
버렸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남 서초 분당 판교 어린이 영어 피아노 방문 레슨 (0) | 2022.08.14 |
---|---|
한국 추리소설 허슬러 (0) | 2022.08.14 |
한국 추리소설 화분 살인사건 (0) | 2022.08.12 |
한국 추리소설 두 사람이 가는 지옥 (0) | 2022.08.11 |
명품 시계를 구매하기 위한 전제 조건 (0) | 2022.08.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