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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단칸방 신혼생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추억

by @블로그 2023.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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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갑지 않은 공기 중의 먼지들...

답이 안 나오는 갑갑한 화장실...

모든 고민의 원인은 단칸방이라는 공간 때문이었다. 결국, 열악한 여건에서 육아를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깐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편함을 선택해서 지금이라도 충분한 공간이 있는 방 2개 이상의 집을 셋방으로 얻으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으로 장기 전세와 같은 공공임대주택 입주나 내 집 마련은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질 수도 있었다. 새로운 셋방에 묶이게 될 목돈과 계약사항이 언제든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불편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단칸방에서 출산과 육아를 하기로 했다. 대신 현재의 단칸방 계약이 만료되기 전까지 주거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집을 잡기로 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아직 납입 횟수가 24회가 넘지 않은 청약통장이 1순위 자격이 되면 장기 전세와 공공 분양과 같은 것으로 서울의 공공 주택에 입주는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지금의 생활을 견디기로 했다.

아내가 임신을 했지만 단칸방에서의 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나니깐 단칸방이라는 공간은 일반적인 신혼집의 수준을 뛰어넘는 의미로 다가왔다. 비장함이라고 해야 하나...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며 가끔씩 알콩달콩한 신혼의 낭만에 젖어들 수 있었던 단칸방은 출산과 육아라는 예정된 상황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헝그리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가 단칸방을 청춘의 보루로 두고, 세상과 맞서 싸우며 희망을 품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무일푼으로 시골에서 상경한 순진한 청년들이 빡빡한 서울살이에 지친 몸을 뉘었던 공간이자 자수성가한 아무개가 가난과 씨름하면서도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꿈을 꾸며 잠들던 공간이 단칸방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단칸방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숙명처럼 맞이해야 할 인생의 과정을 위한 공간이었다. 다시는 겪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 뿐이니깐, 소중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찐한 삶의 시간과 함께할 공간이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공간이 우리의 단칸방이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우리 가족의 역사였고, 추억이었다.

하지만 단칸방에서 육아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주는 자괴감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도 인간이기에 감정에 흔들리는 것은 불가피한 것 같았다. 아직 실질적인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피부로 확 와닿지는 않지만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 끊어지지 않는 생각의 흐름은 한 번씩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깐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단칸방이라는 공간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거대한 삶의 과정을 살아낸 시간들이 분명 우리 가족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 줄 거니깐 지금 당장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도 살아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랬다나에게 목적을 의단칸방이 리는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궁극의 과정달성하기 위해 숙명처럼 거쳐야 할 삶이었고 밑바탕이 될 경 인생을 오히려 반전시키는 정신적 에너지원이었다. 가다가 힘없이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이 공간에는 산다는 것은 분명 가서 단칸방 있는 치나의 삶이었다. 한라 20년 후 위대한 성공 신화의, 찐 비참하다고 느끼는 중이었으며,

좁고, 답답한 방...


단칸방 신혼생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추억



지금 보시는 사진은 지난 7년간 저희네 가족이 살아온 작은방입니다. 2015년 아내와 결혼을 한 후 경제적 어려움과 아내의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처갓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7년간을 저 작은방에서 저희 가족이 살아왔습니다.

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홀어머니 밑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9평짜리 주공아파트에서 20여 년을 살았기에 내방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친구들 집에 놀러 가 자기 방에 책상이 있고 옷장이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 모습에 혼자 서러웠던 시간을 수없이 보내왔습니다.

국가 보조금으로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내 방과 내 옷장 내 책상을 가지는 건 어린 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죠.

경찰관이 되면 많은 것이 바뀔 거라 생각했고 내 소유의 집도 생기고 그렇게 원하던 내 방과 옷장 책상이 생기며 내 자녀들에게는 나와 같은 삶이 아닌 그저 평범한 가정같이 우리만의 공간이 생길 거라고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뼛속까지 가난했던 집이었기에 대출금 이자를 갚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며 병든 홀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에 저축은 꿈도 꾸지 못했고 박봉인 경찰관의 월급으로는 내 집을 갖는다는 건 사치였고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저에게 사랑스러운 아내는 모든 걸 맡기고 저에게 와주었지만 저는 아내에게 남들처럼 우리만의 공간을 마련해주지도 못하며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을 처갓집에서 장인 장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하엘이 다엘이 저와 아내 이렇게 네 명의 식구가 같이 자고 생활하기에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고 친구들 집에 놀러 가고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걸 인식해 가며 어릴 적 저처럼 자기 방이 자기 책상이 자기 옷장이 없다는 걸 알아가며 속상해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왔습니다.

가난이 싫어 죽기만큼 싫어 내 자식들에게만큼은 나와 같은 유년시절은 물려주기 싫었는데..... 미친 듯이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단칸방 신혼생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추억


내 아이들과 사랑스러운 아내와 행복을 꿈꾸며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을 달라며 결혼을 하면서부터 수년간 하나님께 기도해 왔습니다. 가진 거 없는 제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렇게 7년간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고 이제 곧 내방이 있고 내 옷장이 있으며 내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아이들 방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처갓집에서 장인 장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렵거나 불편하지 않았냐고들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기억도 없으며 어머니는 과부의 몸으로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기에 우리 가족에게는 행복했던 기억보단 그저 현실에 몸부림치며 울며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습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처갓집에 들어와 살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집에서 자녀들과 부모가 오순도순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고 지내는 모습에 저는 넋을 놓고 쳐다보며 이런 세상이 있구나...라는 것을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았으니깐요.... 너무나 메말랐고 쓰라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장인어른과 함께 생활하며 치유되었고 장모님의 사랑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냥 날 키워주신 부모와 같이 사는 것과 같았고 너무나도 편하고 하루하루 행복함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가정에 장가들게 하시어 어릴 적 아버지 없이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오며 받았던 상처들을 장인 장모님을 통하여 치유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삿짐을 옮기며 그동안 정들었던 방을 마지막 짐을 옮기며 배웅 나오신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동안 참고 있는 감정이 터져 나와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 못난 아들 다시 돌아오지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들을 갖게는 안 하심에 다시 한번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감사함에 아버지를 끌어안고 감사했습니다... 키워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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