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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이다

by @블로그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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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관람 후 기독교인들을 보고 답답해서 쓴 글




며칠 전에 정말 답답한 스레를 봤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왜 또 구원을 바라며
기도해야 하는가라던가?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이다.
사랑 아니다. 사랑하니까 구원이 되는 거고 구원은 사랑을
동반할 뿐이다. 핵심은 구원이다.

구원은 회개를 통해야 한다.
회개란 우리가 주일마다 주간의 지은 죄를 생각해 내서 눈감고 내가
이번주에 이런이런 죄를 저지른 거 같은데 회개하오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회개가 아니다.
그건 그냥 자아비판이다.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기 순심이네 아부지 말여...
매일 술로 찌들어 살던 이 가 예수 믿고 회개해서 술두 안먹구
맑은정신으루 산대네? 마누라두 안팬댜...
경일만 대믄 애들이랑 마누라랑 싹다 새 옷입구서 회당댕다네?
대략 저런 게 회개다.

아니면, 기독교회가 갑자기 동성애자들의 축복권을 허용하고
동성부부를 인정하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허용한다라고
결정하게 되는 게 회개와 맞먹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그래서 그 사람의 철학과 그의 우주가 바뀌는 게 회개다.
그 회개를 구원의 상태로 이끄는 게 교회의 역할이다.

그의 삶이 술과 폭력과 뭐 술 먹고 폭력을 일삼던
자기 원인에서 돌이켜 새맘을 먹고 새 삶을 꾸리고
새롭게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게 회개다.
어려운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한다.

회개를 통한 구원, 회개가 곧 구원이다.

그리고 그 회개는 복음이 그에게 들리고,
그걸 듣고 회개의 과정에 대한 어려움과 고통에 대한 의지가
나에게 생겼거나 이미 있다는 믿음이 생겨
회개를 하고 구원에 이른다.
기독교회는 이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이게 다다. 더 없다.

저거 하려고 교회 댕기고 예수 믿고 그러는 거다.
바뀌었으면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로 하고 살고 있으면
더 이상 교회를 안 나가도 된다.

알코올중독이든 약중독이든 뭐든 나 스스로 이건 아니다 싶은
빨간 경고등이 들어오는 삶에서
술 끊고 약 끊고 이건 아니다 싶은 그런 것들을 끊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교회 안 나가도 된다.
그런 이들은 교회의 도움 없이 스스로 회개하고
구원이 이른 사람들이다.

아파서 병원 갔는데 나았으면 나은대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뭐 하러 계속 병원 가서 출근도장을 찍나?

그러다 도로 아미타불된 거 같으면
교회 가면 된다.

발길 끊었다가 다시 왔다거나 해서
지랄하는 건 사람밖에 없다.

예수님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다.
아프면 병원 가듯 교회 가라.


전지전능한 신...

왜 내가 섬기는 신은 전지전능해야 하는가?
사실 그렇게 전지전능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사막종교의 신들은 전지전능하다.
유대교의 야웨가 그렇고 이슬람교의 알라가 그렇다.
뭐 둘 다 같은 신의 다른 이름이라 하긴 하더라만...

이유는 전쟁신이라 그렇다.
나의 전쟁 내 가족 내 민족의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줄
신이 필요했고, 그래서 야웨와 계약을 맺었다.
내가 그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줄 테니 너희는 나만 섬겨라.
그래서 나의 신은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과 같아서도 안 되고, 인간의 희로애락에 휩쓸려도 안된다.
그 신은 우리를 승리로, 성공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안내해야 한다.
그 대신 나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 신을 섬겨야 한다.
그것이 그 신과 나와의 계약이다.

나가 치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줘야 하는 신이고
그렇게 나와 계약으로 묶인 신이기 때문에
전지전능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계약은 파기되고 그 신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금의 기독교는 아직도
나와 나밖의 세상을 상보보완이 가능한 관계로 보는 게 아니라
대적적 관계로 본다.

그래서 세상과 끊임없는 투쟁을 지속한다.
끝나지 않는 전쟁을...

그 관계에서 여전히 우리는 신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하며 신은
우리를 우리가 설정한 전쟁터에서 우리에게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줘야 한다.

세상과 나 사이에 타협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정복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종국에는 이겨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을 저렇게 학살을 해대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 저런 사상적 배경이 있어서다.

헌데 웃긴 건,
예수는 이 관계를 일찍이 알았다. 그리고 그걸 깼다.
예수의 전기라 흔히 불리는 복음서중
제일 먼저 쓰인 마가복음 안에
예수는 한 번도 하나님을 야웨라 부른 적이 없다.
아버지라고만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전지전능한가?
전지전능해야만 우리의 아버지인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라 했다.
아빠라고 불렀다.

예수는 저런 전쟁신과 나와의 계약을 깨고
새로운 계약인 아버지와 나와의 계약을 다시 맺었다.
새로운 계약...
신약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신은 아버지다.
전지전능한 전쟁신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고 모여서 만든 예수교이면서
예수를 안 가르친다.

가르치고는 있는데 안 듣고 안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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