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열풍을 바라보는 '문과 덕후'의 마음
<오펜하이머> 열기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근래의 일상적 대화들 가운데 1/3 가량은 "오펜하이머 봤어?"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의외로 이 영화가 마구 끌리지는 않습니다. 제가 과학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당연히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준 덕후' 수준으로 과학에 관심이 많죠. 아마 제가 이 영화에 끌리지 않는 건, '뜨거운 유행'에는 반사적으로 선을 긋는 제 '삐뚤어진 심성'과 (크크크-) 언젠가부터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소 과대 평가된 감독이라고 제가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놀란을 훌륭한 감독이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훌륭함의 정도보다 더 훌륭한 감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열풍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깝기는 하지만요. 흐흐흐,
주인공 오펜하이머를 비롯해서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페르미, 닐스 보어, 리처드 파인만 등 엄청나게 많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영화 <오펜하이머>의 매력 가운데 하나가 될 텐데 (덕후들은 그런 거 좋아하니까요), 비슷하게 문과 쪽 덕후들도 환장하게끔,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벌어졌었던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과정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말이죠.
이를테면 영화의 제목은 <미셸 푸코>로 하는 겁니다, 당대에는 거의 락스타급의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를 갖고 있었고, 개성도 매우 강했으며, 학문적인 유산도 어마어마한, 또 삶 자체가 극적이기도 한 미셸 푸코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아주 적절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거장들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생존을 했었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100세를 채우시고 2009년에 돌아가셨습니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대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 시절에는 이랬습니다"라는 대사와 함께 말이죠. 그러면서, 좀 선배 격인 가스통 바슐라르와 게오르크 루카치로부터 해서 장-폴 샤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둘은 서로 앙숙이기도 했으니), 거기에 더해서 이 둘에 대해서 모두 까기를 보여줬던 아날학파의 거두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구조주의하면 항상 푸코와 함께 이야기가 되는 자크 라캉과 롤랑 바르트, 자크 데리다 그다음엔 질 들뢰즈, 조르주 뒤메질 등과 좀 신진 세대라 할 수 있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바다 건너의 안소니 기든스, 거기에 대서양 건너의 노암 촘스키까지 다 등장하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면 어떨까요? 크크크, 기든스와 촘스키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으니 그분들의 인터뷰를 영화 속에 삽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원작'이 될 만한 책도 이미 있습니다. 프랑수아 도즈가 쓴 <구조주의의 역사>라는 책인데, 한국어 판은 대략 20년 전에 4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저도 학부 4학년 때쯤 신나게 읽었던 책인데, 분명히 학사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는 뭔가 무협지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죠. 어떤 고수가 학계를 평정했다 싶으면, 또 다른 고수가 등장해서 양자 간에 대결을 펼치고, 그러다가 제 3자가 그 둘의 대결을 화해시키기도 하고 말이죠.
이상 과학 열풍이 살짝 부러운 문과생이었습니다! 만국의 문과들이여 궐기하라!
덧붙임; 아, 그런데 저는 과학자 분들이 분명한 맥락이 있는 텍스트들을 원래의 맥락을 소거한 채 자의적으로 사용하면서 '나도 인문학적 감수성이 넘쳐난다'라는 식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일은 좀 안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펜하이머> 속에서도 주인공이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는데,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경전으로 여겨지는 문헌의 글귀를 그냥 직관적으로 사용하는 건 좀 무례한 일일뿐더러, 오만한 행태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없어 보이는 일이기도 하고요. 예컨대, 어떤 인문학자가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자의적으로 인용해서 사용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없어 보이고, 더 나아가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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